시 한잔

암 묵

by 약속의 땅


초록 논바닥,

봄부터 가을까지

바위처럼 있던 백로 하나

말없이 자리를 비운다


그 빈자리에

북쪽에서 날아온

기러기 떼가 내려앉아

얼어붙은 빈 들녘을 채운다


내어준 쪽엔

분노가 없고

차지한 쪽엔

우쭐함도 없다


땅의 주인은

너도 나도 아님을

백로와 기러기는

서로 묻지 않는다


그 들녘을 지나는 나는

쥔 손을 펴지 못하고

빼앗기면 잠들지 못하는 생이라

그들의 암묵에서 멀리 있다


어차피

어디론가 묻혀 갈 인생,

나는 그들의

암묵의 거래가 부럽다


자리를 내어준 백로는

건너편 냇가에 서서

흘러가는 물안개를 벗 삼아

다시, 아무 말 없는 바위가 되어 있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