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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Apr 04. 2021

<소울>-삶의 소중함

타인에 비해서 특별히 더 중요한 영혼이 따로 정해져 있는가?

스포일러와 왜곡된 기억이 같이 있습니다.


소울을 보고 나서 감동이 몰아닥쳤던 날은

오늘로부터 한 달도 더 지난 때였다.

그저 감동했었다는 기억과 느낌만

남아 있을 뿐이니 아마도 그때의 감상을

적게 되면, 이 영화가 실제로 갖고 있는

스토리나 디테일은 분명히 어느 정도

왜곡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기억나는 포인트를

꼭 이곳에 적고 싶어 졌다. 만약 적지

않는다면, 이 영화를 통해 내가 얻은

감동을 공유할 기회는 영영 사라지기에.


글로 나타나지 않은 인상만 남을 것이다.

'꼭 한번 볼만한 영화다' 이 이야기 외에

전달할 수 있는 내용은 사라진다.


개봉 시점에 "소울"에 대한 평가는

최상 수준이었다. 궁극적인 품질의

애니메이션이 나왔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로 거의 모든 감상평과 리뷰가

극찬의 연속이었고, 이에 대한 비난이나

비판은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


아직도 이런 영화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마치 기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영화를 보게 되었을 때, 이 놀라운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에 대한 경외감이 절로

끝까지 시선을 끌고 가고 있었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만이 제대로

소화해낼 수 있는 극화가 펼쳐지고

있었고, 그것은 금세 예상할 수 없는

장면과 인물의 변화와 계속해서

맞물려 들어가면서 끊임없이

나의 관심을 이끌어 갔다.

출처: 디즈니/픽사

그리고 생각을 잠깐 해본다. 평론이나

감상문을 쓴 뒤에 그것을 볼 사람의

반응이나 집중도는 어떻게 달라지는가?


일단, 아주 극찬을 받는 인물이 아니기에

대중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작가가 아닌

나의 글을 열심히 끝까지 읽어갈 사람은

드물 것이다. 글 내용이 중요한 것보다 우선

작가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글의 중요성 평가에

영향을 미치고, 읽을 동기의 수준을 결정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인 여러분이나 나도 그런

"후광 효과"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더 유명한

작가가 되어서 자신의 글을 기꺼이 읽어주고

호평을 남겨줄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 아니던가.


한 편의 글을 써서 올릴 때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특별함과 고유성, 독창성이

인정받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하고, 그것을 많은 사람이 알게

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한 플랫폼이

되는 것이 "브런치"의 야심이며, 수익 모델이다.


훌륭한 재즈 피아노 연주자가 되는 것이 필생의

꿈이었던 흑인 비정규직 음악 교사가,

들어가고 싶었던 재즈 뮤지션의 밴드에

오디션을 보러 가기 직전에 맨홀에 빠져

갑자기 죽은 안타까운 이야기가,

다시 내세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전지전능한 신이나 권선징악의

스토리로 이어지는 것이

통상 할리우드가 안전성과 흥행성을

동시에  보장하는 방식이었다.

출처: The Guardian

그리고 그 과정에서 특별한 존재가 되어 가는

주인공에게 관객은 자신의 모습을 이입시키며,

짧은 시간이 나마 대리 만족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소울"은 그런 안전한 흥행의

가도에 이를 수 있는 스토리 라인을

과감하게 벗어나기로 했다.

 

물론, 그래야만 흥행이 되는, 정말 특별하고

독창적인 작품만이 인정받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는 하다.


그전의 시대보다 훨씬 손쉽게 자신의

작품을 세상을 향해 내놓을 수 있는데

반해서 그중에서 정말 특별하게 인정

받는 존재가 되는 비중은 점점 더

희소해지는 현상이 벌어지니까.


"소울"의 스토리 라인은 얼핏 문제 투성이에

변두리 인물이 되는 "태어나기를 거부하는

영혼",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자 기를 쓰고

세상을 향해 자신을 던지는 이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 자체를 맹렬히 거부하고

"내세" 공간에서 그대로 머문 채로 살아가길

고집하는 "영혼"이 주인공이 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출처: Decider

그런 "영혼"에 비교해서 훨씬 목적의식이

강하고 사람들에게 존재감을 인정받을만한

실력 있는 "영혼"이 자기 자리를 찾아

다시 태어나고, "재즈 연주자"로서 엄청난

인정을 받게 되는 스토리가 더 합당하지

않던가? 그게 더 우리가 그동안 흥분해

왔고 원했던 스토리가 아니었나?

출처: 반스 앤 노블

삶 속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고, 존재감을 인정받아야 할

확실한 이유를 갖고 있는 "자기 자신"보다,

그 흑인 "재즈 연주자"의 영혼은 어쩌다가

자신과 함께 원하지도 않았던 삶을 잠시

경험하고선, 햇살과 바람, 먼지 같은 삶의

작은 부분들에 대해서 훨씬 더 민감한

애착을 금세 느끼고, "삶" 그 자체에

사로 잡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보다

“무작정 살고 싶어 하는 영혼"에게

다시 지상으로 태어날 기회를 양보한다.


누군가에겐, 이런 스토리가 왠지 억울하고

"말도 안 돼, 그런 바보 같은 짓을!"이라고

펄쩍 뛰게 만들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왠지 "입신양명"이라든가

"출세와 성공 지향"을 최선으로 삼고 있는

이 사회에 던져진 지금 이 시점에 필요한

하나의 놀라운 신호처럼 읽혔고, 결말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아무 말 없이도 관객들이 느끼게 만들었다.


그 누구의 삶도 우선적으로 더 낫다고

평가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고도

절절이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이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가장 타당한

자격을 가진 자가 하나 꼭 있어야만 한다면,

이 삶을 그 자체로 제대로 느끼고, 충실하게

경험코자 하는 자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느낄 수 있는 그러한 "영혼"으로

자격을 한정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 피부색, 문화적

지향, 철학적/정치적 지향 등을 통해서 판단한

차별이나 평가의 기준보다 "삶"을 그 자체로

느끼며 살아가고자 한다면 그 누구든지

"살 자격이 있는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고

적어도 내겐 그렇게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영화 속에 "악"이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았고, 전지전능하여

인간 간의 신분이나 성공의 차이를 부여하는

"신"처럼 절대적인 존재가 나타나지 않았다.


기존의 모든 흥분되는 영화 속 공식을 벗어난

매우 차원 높고도 깊은 사유가 들어 있는

수준 높은 작품이 "애니메이션"으로 나온 것이다.


시사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요소는

피부색이나 국가를 기준으로 서로를 차별하면서

점점 더 누가 더 이 세상에서 누릴 것을 더 많이

누리면서 잘 살아갈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따지며

맹렬하게 싸우고 있는 세상의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돌아보게끔 만든 것이다.

 

그 틈바구니에서 자신이 속한 작고도 큰

갖가지 공동체에서 누구든 자신이 갖고

있는 "삶"을 제대로 느끼며 살아가고자 한다면

그에겐 "삶"을 살아갈 "자격"이 분명히 있다는

정말로 순수한 깨달음 하나를 크게 던진다.

"영혼"이 있을지 없을지를 판단하며 아옹다옹

싸우는 논쟁을 원한 것이 아니라.


목표나 꿈이 있는 삶.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없는 삶이 가치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삶은 그 자체로 가치 있다.

엄청나게 훌륭한 글이 아니더라도

 에 나름의 가치가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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