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진과 사브리나의 어린 시절
f. 사브리나의 이야기-1
'지방의회나 재계에 가라...'
마리가 한 말이 계속 머리를 맴돌았다. 그리 새로운 말도 아니고,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말인데, 마치 비수에 꽂힌 듯 그 말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건 사브리나가 미래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꿈이 산산조각 났고, 또 갑자기 나보고 선택을 하라고 하니 난 도대체 여기서부터 뭘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지?"
그는 마치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며 걷고 있었다. 지금 막 심리학 개론서를 마친 학생이라면 그를 보고 정신분열증이라고 착각할 듯한 이른바 넋 빠진 상태였다. 이렇듯 마음이 잡히지 않을 때는 걷는 게 최고다. 그것도 중얼거리면서... 걷다가 도착한 곳은 웨스트 서울 지방 의회, 관공서 앞이었다.
'내가 언제 이곳까지 왔지?'
사브리나는 온 김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어차피 한번 와보고 싶었다. 어쩌면 그의 혼란을 잠재우고 싶은 욕망이 그를 이리로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만일 내가 여기서 일하게 된다면 무엇을 하게 되는 걸까?'
(출처: Photo by Pang Yuhao on Unsplash)
의회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갑자기 이상한 기운에 휩싸이게 되었다. 아주 사람을 몽롱하게 만드는 기운 같은 것이 느껴졌다.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머릿속에는 두어 명 정도의 사람의 이미지와 눈이 떠올랐고, 그 눈으로부터 의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전달되고 있었다. 정면으로 사브리나를 보고 있진 않았지만, 사브리나는 측면에서도 그 눈의 언어를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은 그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잘 되고 있어?>
<그럼!>
<그래도 조심해야 해. "진"이 있다는 건 유사한 변종이 하나라도 더 있을 수도 있단 이야기가 되니까. 위험을 마주하고 있는 거라고.>
<안다고, 안다니까... 참내! 아직 "관찰자"의 존재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건 확실해.>
<그럼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숙고하라고.>
<잠깐, 이건 뭐...>
그것은 매우 짧은 순간이었는데, 사브리나 뇌가 스스로 만든 자극인지 외부에서 유입된 자극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의회 안에는 몇몇 사람이 일루미네이션 공원에서 오락을 즐겼던 것과 같은 자세로 사무를 보고 있었다. 아마도 온라인으로 여론을 수렴하는 것처럼 보였다.
(출처: Photo by Jason Oh on Unsplash)
'회의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사브리나는 아쉬웠다. 옆에 관공서에서 행정직인 사람들은 무얼 하고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관공서 직원들도 모두 민원업무를 처리하는 듯 모두 온라인에 접속 중이었다.
그는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빨리 시장을 견학해보고 싶어 졌다. 그는 튜브를 타고 시장으로 이동했다.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뒤로하고 아까와 같은 이상한 전기 막이 형성되었다. 그것이 사브리나에게 마치 아까의 여운처럼 희미하게 느껴졌다.
'잘못 본거겠지. 내 마음이 온전치 않아서......’
<어떻게 된 거야?>
<웬 여자가 우리의 네트워크에 반응했어.>
<그걸 누가 몰라?>
<꼴통 같은 의원이 여론 수렴하는 방법을 몰라서 교육하러 한 명이 의회에 나가 있었는데,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군... 어디 누가 찾아오는 곳이어야 말이지... 그건 그렇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아, 잠깐 정보를 찾아보니 거의 "진"급에 달하는 여자야. 얼마 전까지 핸들러로 교육받다가 사고를 쳐서 쫓겨났어.>
<"진"만 구인류 중에 집중적으로 관찰해야 할 존재로 파악되었던 거 아니야?>
<그렇긴 하지. 하지만 별 상관없을 것 같은데, 이미 핸들러로의 생명은 끝났으니까>
<그래, 그래... 게다가 접속 시간상 얼마 되지 않았으니 환영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그렇겠지...? 심리상태도 그리 안정적으로 보이진 않네. 일종의 자책감과 후회, 열등감이 있어 하지만 그걸 극복하려고 엄청난 의지를 발휘하고 있는 중이야. 마음에 여유도 없는 상황이네. 그냥 넘어가겠지. 우리 채널 접었으니 이제 됐어.>
시장을 견학하면서 오프라인 매매가 거의 희소한 이 시대의 모습을 이제야 제대로 체감할 수 있었다. 모든 경제활동은 온라인으로 옮겨와 있었고, 실물의 거래는 무형의 거래에 비해서 비참할 정도로 위축되어 있다.
(출처: Photo by Jezael Melgoza on Unsplash)
아주 고가의 제품이나 "바이오 메카트로닉스" 기기, 일상 용품 중에 실제로 만져보고 느끼고 그다음에 마음을 정해 고르지 않으면 구매로 연결되지 않는 희소한 제품군만 오프라인 시장에 있었다. 소비자가 오가는 발걸음도 극히 희소해진 이곳에 굳이 왔다는 것부터가 비효율적인 판단이었단 생각이 들었다.
이미 이 모든 것은 검색으로 통계화해서 파악할 수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 이야기 나누며 파악하니, 재계에 진입하는 것은 시뮬레이션 게임 산업을 지배하는 "프레마치온"의 회사 및 연관 조직에 들어가 일하면서 이 게임의 상업성과 품질을 높이는데 기여하는 것 외에는 성공할 루트가 매우 희소했다.
실시간적인 인수합병이 다발적으로 일어나면서 인류의 필수 제품을 생산 및 판매하는 회사는 각 제품 별로 2~3개 정도로 통합되어 있었다. 각 제품 별로 경쟁하는 회사의 수는 희소하였고, 독과점적인 지위를 가진 각 회사는 재고 관리를 최소화하기 위해 희소한 종류의 제품만을 생산했다.
단, 제품 외형은 디지털화한 방식으로 소비자의 개성을 발휘해서 커스터마이즈가 가능했다. 무엇을 사는가 보다 산 뒤에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집중하도록 함으로써, 제품 선택권이 줄어든 소비자의 불만을 무마했다.
3D 프린팅 기술의 발달로 소비자가 온라인 상에서 주문을 하는 시점에 제품을 만들어 짧은 시간 안에 거주지까지 드론으로 날려 보내는 방식의 거래가 대부분의 구매 방식이어서 이 드론 배송 시스템까지 통합적으로 갖춘 거대 기업을 일반적인 창업 기업이 경쟁상대로 삼을 수 있는 방법은 희소했다. 이른바 니시 마켓까지 대기업이 장악했다.
스타트업들이 주로 일어나는 제품은 "일루미네이션 공원"내에서 팔리는 게임 내의 무형의 아이템 라인이었고, 거주지까지 연결된 채널로 집에서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가상현실 체험 의류와 장갑, 신발 등의 실물 제품을 파는 정도였다.
블랙마켓이라 불리는 불법적인 거래가 성행하는 시장의 뒤편에는 고위험 고수익의 기회가 있었다. 이곳에는 주로 지난 세기의 제품이 거래되고 있었고, 그곳의 주요 업자와 고객은 주로 메인프레임의 네트워크로부터의 이탈자다. 이들과 거래하는 것은 그 자체로 위험했고, 거래 기록이 남기라도 한다면 신분이 더 낮아질 확률이 높다. 선택하지 않아야 할 옵션은 하나 제대로 발견했다.
고민의 시간을 보내던 중에 여러 날이 흐르면서 "직업 적성 검사" 시험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선택을 해야 한다. 사브리나는 적성검사 시험장에 들어서면서 아직도 결정을 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고 있었다. 지난 시기 핸들러로서의 적성검사를 받을 때 확고했던 자신의 의지를 생각하면 한숨이 나올 뿐이었다.
'왜 두 시험을 모두 보는 시간 낭비를 사서 할까? 그나마 행정직은 가지 않겠다고 결정해서 선택지가 두 개로 줄어든 게 얼마나 다행이야... 휴...'
사브리나 자신의 판단에서도 행정직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지방의회로 가면 진과 다른 동료들을 빨리 만날 수 있겠지만, 작업이 상대적으로 단순한 것을 어떻게 참아내느냐의 문제가 걸리고, 재계로 진로를 잡으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지만, 성공 확률은 낮아 보였다.
'그래, 지금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할 것 같으니까 둘 다 봐서 1점이라도 높은 쪽으로 결정되도록 하자!'
자신이 결정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운에 맡기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평소에 사브리나는 경멸해왔기 때문에 사브리나는 멈칫 놀랬다.
"아, 지금 진은 무얼 하고 있을까?"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걷다 보니 어느새 시험장 입구다. 패자부활전처럼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보는 시험이기에 시험장은 한산했다. 맘 내키는 대로 아무 자리에나 앉아 접속을 시도했다. 시험을 클릭하고 문제를 풀어갔다. 그는 이내 시뮬레이션의 세계로 들어간다.
(출처: Photo by Jezael Melgoza on Unsplash )
"자, 이제 모든 전자기적, 또는 기계적 장치로부터 해방된 편안한 의식의 심층부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당신은 이전까지 일상생활 속에서 사용해왔던, 모든 정보 검색의 편의를 제공하고 기억 영역을 확장해왔던 기재들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기저 심층 의식 속으로 유영해 들어가게 됩니다......"
내레이션이 흐르는 이 공간은 시험의 동굴이라는 명칭을 달고 있는 시뮬레이션 테스트 시스템의 최적 구성을 맞추었네 어쨌네 하는 곳이다. "원초적 의식(Primitive Consciousness)"이라는 명칭으로도 나온다.
현재까지의 문명의 발달과는 무관하게 자기 자신의 의식을 송두리째 발가벗겨내어서 의식의 심층부, 무의식과의 경계 지점까지 시스템이 파고들어 가, 시험 대상자의 가장 깊은 내면까지를 모두 탐색해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폐쇄된 시험 전용 시뮬레이션 안에서 사브리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내부를 송두리째 들어내어 마치 인류가 영화라는 영상문화 속에서 그려왔던 유체이탈 이후의 혼령처럼 어둡고도 축축한 동굴 안에서 문제와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출처: Photo by Jezael Melgoza on Unsplash)
메인프레임 접속의 기회도 차단되고, 그리고, 신체 내에 장치했던 기억 보조 장치나, 검색 장치도 완벽하게 해제된다. 대신 내레이션을 전달해주고, 수험자의 의식의 내용을 목소리처럼 재생하고 다시 이를 리코딩할 수 있는 전자기적 장치 하나가 접속과 동시에 연결되게 되는 것이다.
지나간 인류의 시대에 있어서 이 같은 시험장치가 가혹한 숙청을 불렀던 일례가 있기는 있었다. 이 기재를 통해서 발견된, 이른바, 사회 파괴적 성향의 소유자, 또는 어떻게 변화하게 될지, 사회에 미치는 파급적 효과에 대한 예상이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 가능성이 무한한 것으로 판단되는 존재들에게, 사회는 무자비한 격리 명령을 내렸었다.
New Gloomy Black Era라고 불리는 이 시대가 이미 지나간 지 100여 년 가까이 되었지만, 그 시대의 망령들은 그대로 일루미네이션 공원의 시스템 속에 보존되어 있다, 그 시대를 혹자들은 지나치게 사람들이 평균화되고, 평준화된 시대라고 한다.
시험을 볼 때마다,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그때의 그 무자비했던 시대에 대한 기억으로 심리적인 위축을 겪게 된다. 그리고, 이 분위기를 자아내는 시험을 실시하는 당국은 바로, 이 분위기야말로, 가능한 모든 시험 부정행위를 축소화시키는 분위기라고 생각하는 듯하였다.
물론, 이것 역시 극히 관료적 발상이다. 더 나쁜 것은 이러한 시험을 치르게 되는 쪽이, 실상 특별한 권력층에 속한 사람들을 제외한 일반적인 시민들이었다는 데 있다.
특권층에 이미 속해있는 사람들에게는, 흑연이 들어 있는 연필을 사용하거나, '사인펜'이라는 사치품과 'OMR'카드라고 하는 이 시대에는 이미 귀해져 버린 종이를 사용한, 아주 고풍스럽고 보다 구시대적이고, 낡아 보이는 방식의 시험이 허용되었다.
이 상황에서, 시험 부정용의 복고적인 기재를 만들어 사용하는 수험자가 있을 시, 이에 대한 처벌은 보다 더 구시대적으로 행하여졌다. 그것은 벌거벗은 엉덩이를 '노'형태의 기다란 막대기로 내리치는 형벌이었다.
물론, 일반 수험생들에게 허용된 시험에서도 부정행위를 행하는 자들이 종종 있었다. 그들은 시험 도중에 자신의 각막에 미리 각인시켜둔 집적 정보를 심층 의식으로부터 솟아올라 보고 내려가는 방식을 사용했었다.
이 경우에, 시험 당국은 그 부정 수험자의 의식에 약간의 페널티를 부과하였다. 이를테면, 약 한 달간 배변을 보아도 시원한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든지, 1년간, 공부 이외의 행위를 통해서는 쾌감을 얻을 수 없게끔 해 놓는다든지, 사회적 여론의 수렴에 따라서는, 이 방침들이 완화되거나, 강화되거나 하였지만, 부정 수험자는 어떤 방식으로든, 확실한 제재를 받아야 한다는 사회적 여론에는 이의가 제기되지 않았다.
이 시험에서 사브리나는 좋은 점수를 받는 방식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의식의 의지를 유지하는 일관성과 그 의지를 구성해내는 문화적으로 체득되어온 산물들을 자기라는 체를 통해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걸러내어 가공하였는가를 동굴 저편의 내레이션을 향해서 굳건한 의지의 목소리로 답변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심층부의 의식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거나, 절제력 없이 의식을 이리저리로 돌려내는 수험자는 절대적으로 올바른 평가를 받을 수 없었다.
의식의 컨트롤을 수행하기 시작하였고, 내레이션으로 들려오는 과제 하나하나에 대해 답변하기 시작하였다. 하나하나씩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답변하였다.
'아무튼 오늘 나는 시험을 치렀고, 나의 진로는 결정된 거야. 다시 최선을 다하자. 재계도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었어. 사실 실세잖아... 추천서를 받기 위해 마리를 찾아가야지...'
사브리나는 만족했다. 그런데, 과연 뭘까? 이 이상한 느낌은...???
잠깐 가까스로 인식했던 그 환영들의 대화가 시험을 보는 중에 다시 떠오르고 조합이 되었다.
그들은 사브리나를 구 인류 중에 하나라고 했고 진이 관찰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치 크로마뇽인이 네안데르탈인을 이야기하듯이. 이런 환영이 떠오를 아무런 개연성이 자신에겐 없다.
그것은 분명히 외부로부터 자신에게 들어온 내용이다. 그 느낌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시험 과정 중에 깨달았던 것이다.
SF 소설 튜닝 Part-II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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