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가 있었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 침입자가 리처드 인지도 알 수 없었을뿐더러 싱크율을 줄이는 것으로 사람이 크게 다칠 수 있다는 것은 사브리나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탈레스로 게임에 참여한 리처드는 뇌에 심각한 충격을 입었다. 케언즈는 다른 방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가 신음소리를 듣고서야 리처드를 발견했고, 서둘러 의료로봇으로 응급처치를 하고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미 리처드는 뇌에 회복 불가능한 심각한 손상을 입고 난 뒤였다.
(출처: upsplash.com)
리처드의 사건으로 사브리나는 핸들러로서의 인내심이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게 되었고 교육에서 제외되었다.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상심하는 케언즈의 표정을 보는 순간 사브리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진은 사브리나의 잘못이 아니라며 강하게 반발했지만 시스템의 버그를 알아내고서도 알리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책임을 지지 않을 수는 없었다. 사실 위원회에서는 사브리나에게 중징계를 가하려고 했지만 케언즈가 강력하게 선처를 희망했기 때문에 직위해제로 끝나게 된 것이었다.
며칠 간의 대기기간이 끝나고 그는 교육기관의 기숙사에서 일반 숙소로 옮겼다. 며칠간의 교육 후에 상수도의 안전과 수질을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일이 배정되었다.
맞지 않는 일이었지만 1년 이내에는 단순노무직과 자원봉사를 제외한 다른 일은 허용되지 않았다. 사브리나는 오히려 홀가분한 생각이 들었다. 옛 생각을 떠올리며 괴로워하기보다는 다른 환경에서 천천히 새로 시작하는 것도 좋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쁘게 최신 지식과 정보를 흡수하던 그는 점점 단순한 반복 작업을 견디기 힘들었다. 매일 18시간 넘게 공부하던 그에게 그 고요한 적막의 시간은 고문이었다. 유일한 해방구라면 자원봉사로 노인들의 말 상대가 되어 주는 것이었다. 그중 짙은 밤색 머리카락의 마리라고 불리는 한 할머니는 오히려 사브리나의 이야기를 더 열심히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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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브리나는 이상하게도 마리에게 자신의 이야기와 생각을 쉽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일과 자원봉사를 하며 6개월쯤 지났을 때였다. 뜻밖의 소식이 전해져 왔다. 몇몇 상위의 직종을 제외하고는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것이었다.
"마리 저 이제 직업을 옮길 수 있게 됐어요."
"오! 잘됐구나. 그 때문에 울적해하더니....... 그래 원하던 일은 생각해 뒀니?"
"아뇨. 이렇게 일찍 기회가 올지 몰라서 생각할 시간이 없었어요."
사브리나의 들뜬 모습을 본 마리의 주름진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 그럼 내가 권해줄까?"
"뭐든 이야기해 주세요. 하겠다는 말씀은 못 드리겠지만 마리가 권하는 거니까 제일 위에 두고 생각해볼게요."
마리는 잠시 생각하는 듯 흔들의자에서 창문을 통해 바깥을 보다가 말을 꺼냈다.
"난 사브리나 네가 정계나 재계 쪽으로 가면 좋겠어. 그곳이라면 단순한 행정관리직보다 좀 더 복잡한 곳이니까 사브리나 네 재능을 충분히 살릴 수 있을 거야."
"그곳이라면 어느 정도 인맥이 있어야 진출할 수 있는 곳 아닌가요? 게다가 전 지난번 말씀드렸던 사고 때문에 힘들 거예요.”
"그거야 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 나도 가게를 하는 친구나 동네에서 한 자리하는 사람을 조금 알고 있단다. 정 필요하면 추천서 같은 것도 써줄 수 있어."
사브리나는 가끔 마리를 찾아오곤 하는 마리의 친구들을 떠올렸다. 마리를 보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한 번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West Seoul에서 조그만 구멍가게를 한다는 대머리 할아버지 찰리, East Seoul 근교에서 지방 공무원으로 재직 중이라는 배불뚝이 할아버지 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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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마리 생일 때 찾아온 두 할아버지 말씀하시는 거죠?"
"생일 때 온 걸 봤나 보구나. 한 번 봤다니 더 소개하기 쉽겠네. 네가 그쪽으로 생각 있으면 그 친구들에게 소개장을 써줄 테니 꼭 말해야 한다. 알았지?"
마리와 대화하는 것으로 그날의 일과를 끝낸 사브리나는 숙소로 돌아왔다. 노트를 꺼내 어제 적다만 지원할 곳 리스트를 채우기 시작했다. 중앙 정계로 진출하는 것은 이미 리처드의 사고로 어려워진 터라 지방의회나 재계 쪽으로 방향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