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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Apr 09. 2023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그럼에도 독자의 편이다

순문학 전문가의 관점에서 보는 하루키의 글의 가치를 들여다보다

* 이 글은 ChatGPT의 도움을 받아 쓰였습니다.


이 책은 일본의 문예평론가인 가토 노리히로가 쓴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가론이다.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데뷔작부터 최근작까지 작품들을 시기별로 구분하고 분석하면서 그의 문학적 특징과 변화를 살펴본다.


또한 그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 인식되면서 일본 국내에서 그의 문학을 진정으로 논의할 기회가 사라져 버린 사실에 주목하고, 그를 스타 작가로만 바라보는 틀을 깨고자 한다. 저자는 하루키에게 바라는 점과 조언을 전하면서 그를 향한 애정과 응원의 마음을 드러낸다.


"~~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들이 모두 소용없어졌다. 왜냐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세계적인 메가 셀러 작가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 국내에서 그의 문학을 진정으로 논의할 기회를 사라지게 만들었다.(13 페이지)"


하루키의 작품들에 대해서 깊이 있고 세밀하게 분석하고 평가하는 내용이 대부분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하루키의 문학적 성과와 한계를 솔직하게 지적하면서도 그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돕고자 하는 태도를 보였다.


저자의 비평은 학문적이고 전문적이지만 독자 친화적이고 재미있게 쓰여 있어서 읽기 쉬웠다. 나도 나 자신의 문학관을 되돌아보고, 다른 사람들의 비평에 귀 기울이고, 용기 있는 변화를 추구하는 작가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끔 만들었다. 반응 하나 구하기 어려운 글을 쓰곤 있지만.


이 책은 하루키의 팬이라면 누구에게라도 추천할 수 있는 유익하고 흥미로운 책이며, 그저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럼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이 왜 그랬던 것일까를 복기하는데 도움이 된다.




왜냐면 또한 하루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심리적인 층위와 감정의 흐름, 그리고 그의 소설에 나타나는 상징과 은유들을 자세히 분석하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하루키의 작품에서 보이는 인간의 본성과 욕망, 삶의 불확실성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저자의 문장은 간결하고 명료하며, 그의 분석은 깊이 있고 자세하다. 그는 하루키의 작품을 분석할 때 매우 체계적이며, 독자가 쉽게 따라갈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하루키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이 책은 어려울 수도 있다. 기본적으로 하루키의 작품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전제로 책을 썼기 때문이다.


총평하자면, 이 책은 무라카미의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기 위한 필독서이다. 노리히로의 분석과 해석은 매우 유익하며, 하루키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책을 놓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위의 두 단락은 ChatGPT에게 2가지를 부탁해서 쓰인 글이다. "1. 가토 노리히로가 쓴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의 서평을, 2. Roman의 브런치(프로필 링크 전달)에 쓰여져 있는 글 스타일로 써줘." 이렇게 쓴 다음에 1분 내로 받은 서평 2개다.


맨 위의 글은 내가 쓰고 있는 아이폰에 MS Edge를 깔아서 빙챗(ChatGPT 4.0을 사용)을 사용하여 작성한 글이고 그 아래의 글은 맥북 에어에 MacGPT(ChatGPT 3.5를 사용)을 설치해서 작성한 글이다.


빙챗은 버전업이 되었기 때문이겠지만 인용문까지 포함한 더 세밀한 작성법과 더불어 인용한 링크까지 제시하는 섬세함이 있지만, MacGPT는 누가 봐도 무난한 수준에서 글을 작성해 냈다. 각기 아주 조금 수정을 했는데, 맨 위의 글은 하루키를 아는 팬이던 아니던 모든 독자에게 이 책을 추천한 반면, 아래의 글은 어느 정도 하루키의 책을 봐왔던 이가 아니라면 추천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적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자 하루키의 팬으로서 직접 한 권의 책을 모두 본 독자인 나로서는 이 책을 봐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이 인공지능 챗 프로그램 2개보다는 아직은 더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그게 무엇인지 이제 아래에 쓰려고 한다.



책의 앞부분에서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하루키의 책은 아주 많이 팔렸고 유명세도 점점 더 해갔지만 정작 일본이나 한국, 중국 등 여러 국가의 지식인이나 필자층이라고 할만한 사람들은, 심지어 하루키가 공적으로 옹호했던 작가마저도, 당연하다는 듯이 "하루키의 책은 읽지 않는다"는 말을 거리낌 없이 했다는 것에 대해서 하루키를 "젊은 척 코스프레를 하는 가벼운 작가라는 폄하"가 지식인층 일반에 펴져 있는 현상이 오해라는 것을 밝히겠다는 의도가 이 책이 쓰인 중요한 이유다.


그렇다면 이 책을 보여주어야 할 대상은 하루키 작품을 여러 권 읽은 팬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작품을 폄하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하기 일쑤인 식자층, 지식인, 문학전문가 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알맹이가 없이 속이 빈, 겉만 그럴듯한 작품이란 평가가 얼마나 많았던가?


일본 내에서 그의 초기 작품들을 비난에 가까울 정도로 비판했던 작가 중에 하나는 노벨상을 수상했던 "오에 겐자부로"였다. 그조차도 하루키의 중 후반기 작품으로 가면서 내린 평가가 "하루키는 자기 세계를 갖고 있는 작가"였던 적이 있었다. '23년 3월 3일에 돌아가신 그는, 하루키가 존경하고 배우고자 한 작가 중의 1인이다.


내가 읽은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은 "일상생활의 모험" 단 한 권뿐이다. 그 책의 신선한 느낌을 지금 떠올려보자면, 그 시작은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와도 유사한 느낌을 어느 정도는 선사한다.


그가 초중반부의 "하루키" 작품을 맹렬하게 비난한 이유가 어쩌면 자신이 어깨에 힘을 빼고 살짝 무거움을 내려놓으면서 쓰고자 한 작풍에 대해서 알게 모르게 부끄러움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고, 그런 그를 배워서 비슷한 작품을 하나 만든 "하루키"의 나름 눈물겨운 노력이 그 두 개의 작품이 살짝 동기화되는 듯한 톤을 지닌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 책에서도 하루키의 작품을 연대기처럼 나누어서 초반에는 사회로부터의 분리와 고립을 추구하면서 근대 문학이 요구하는 부정적인 현실에 대한 부정을 추구하던 문단의 방향과는 달리 긍정적 현실의 긍정을 추구함으로써 오히려 시대를 앞서가서 부정성을 추구하는 것 외의 가치를 통한 성장과 성숙이 모자라고 뒤쳐진 문학계가 긍정의 긍정을 추구하는 미래의 방향으로 이동하는 흐름의 최전선에 섰다고 평가한다.


그가 전통 문단의 부정성을 추구하지 않는 듯한 글을 씀으로 해서 매우 가벼워 보이고 고민이 없는 글을 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고개를 돌릴 만큼 부정적이기 그지없는 현실을 떠난 다른 방향을 추구할 여지를 갖고 있었던 것이고, 언급되지 않았던 부정적 현실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부정을 표현했다는 합리화가 나온다.


그렇지만 책의 중후반부에서는 현실로부터의 이탈과 고립을 추구하는 전반기와 자기 규율을 추구하는 중반기, 현실에 대한 변화를 추구하면서 역사와도 맞닿는 후반기로 가면서 하루키란 작가 자체가 성숙했고 이에 따라 글의 무게도 더 무거워지고 성장하게 되었다는 부연을 하고 있다. 결국 하루키의 초반부 작품이 가볍다는 이유로 비판받았던 것을 모두 변호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음이 드러난다.



저자는 오랜 세월, 대략 33년가량, 하루키의 작품을 최소한 장편 소설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아온 나 같은 팬에게는 하루키를 좀 더 옹호할만한 단서를 제공하는 데 성공한 것 같다. 그렇지만, 하루키의 작품을 폄하하면서 여전히 보지 않는 식자층에게 이 글이 설득력 있는 내용으로 다가갈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을 하루키가 원할지도 나는 잘 모르겠다. 왜냐면, 그는 아직도 전통 문단이나 전통 문학계에 빠져들지 않은 자유로움을 지닌 채 살아 있고, 그런 자유로움 속에서 상상력의 힘을 유지하는 작가일 거란 강력한 심증 때문이다.


오히려 가토라는 이 저자가 하루키를 변호하는 입장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그의 글을 출판하고 있는 출판사들의 편이 되어주고, 하루키 신드롬에 근거해서 유지되고 늘어나고 있는 책의 판매량을 좀 더 보전하기 위한 사회적 방패가 되어주는 수준의 변호에 그치지 않을까? 그건 마치 위에 ChatGPT가 각기 버전을 달리해서 어디에서 욕먹지 않을 정도의 수준의 글을 쓰고 있는 것과도 유사한 작업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또 하나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읽었던 부분은 한 때는 같은 신드롬을 유지하면서 최소한 일본 문단 내에서 쌍벽을 이루며 서적 판매량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던 "무라카미 류"와의 비교였다. 그는 한때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류작을 쓰는 작가처럼 보이게 될 정도로 먼저 더 화끈한 스토리텔링으로 서점가를 정복했던 작가였고, 실제로 "코인로커 베이비"같은 작품에 대해서는 "하루키"도 많은 부러움을 표현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류"의 작품은 더 이상 의미 있는 판매고를 올리거나 화제성을 갖고 있는 작품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너무나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화끈한 남녀상열지사와 고어에 가까운 말초적 자극으로 범벅이 된 문장을 소설에서 남발하고 에세이에서는 "못생긴 여자는 세상에 필요 없다"란 식의 망언을 하며 사라졌다.


이 둘 간의 비교에서 저자는 "류"의 출세작인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라는 작품이 기존 문단으로부터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혁명성을 갖고 있었지만 "하루키"는 타지 못했던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이유가 그 소설은 여전히 근대 문학의 관성대로 "현실을 부정하는 부정성"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다고 해석한다.


그 이후로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현시대에 호응하는 작품을 계속 만들며 더 성장하면서 나아갈 수 없었다고 평가하는 내용이 나온다. 결국 선구적으로 문학의 새로운 방향을 잡아 나갔으며, 계속적으로 작가적 성장과 더불어 문학성도 성장하고 있는 것이 "하루키"라는 칭송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이 나온 2017년으로부터 6년 여가 지난 2023년의 봄에 이 책을 게눈 감추듯이 빨리 읽어치우고는 지식인이 되었든, 비지식인이 되었든 그 경계가 맹렬하게 무너져온 최근의 시간을 잠시 다시 뒤돌아보게 된다.


어디서든 역사와 철학, 예술 등의 방대한 내용을 모바일폰으로 검색해서 영상물과 텍스트, 그래픽으로 잘 정리해서 볼 수 있는 이 시대의 일반인과 그 2~30여 년 전의 지식인이라고 자칭했던 이들의 지식수준과 판단 수준이 과연 엄청나게 달랐을까 싶기도 하다.


진지한 서적에 대한 관심은 나날이 시들고 있고, 이제 누가 어떤 책을 보았다고 해서 늦지 않게 꼼꼼하게 찾아가서 읽는 사람을 보는 것이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더구나 ChatGPT는 이제 논문과 판결문, 소설, 시나리오, 보고서 등등을 사용자의 아이디어와 지휘를 통해서 썩 괜찮은 초벌구이 도자기 수준 정도로 잘 뽑아내는 동시에 검색 작업마저 간편하게 축약된 상태로 결과물을 가져올 수 있도록 효율화시키고 있다.


인공지능을 사용하면서 어쩌면 인류는 자기 사고의 힘을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겠지만, 반면에 이제까지 수많은 서적 속에 있는 지식과 정보를 독점하듯이 보유하며 이를 통한 지식인으로서의 지위를 어떻게든 유지했던 수많은 이들이 인공지능과 더불어 지식과 정보를 쌓아 올리고 쉽고도 빠르게 찾을 수 있는 대중 앞에서 이전 시대만큼 자신의 위상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하루키"가 시대를 앞서 가서 보았기 때문에 가볍고도 대중성 높은 글을 썼을지도 모른다. 첨단 고도 자본주의 사회의 무서운 발흥에 대해서 그의 감수성이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 그의 글에서는 역력히 드러나니까. 이제 재미있는 서적, 대중이 SNS 등을 보기만 해도 빠듯한 시간을 어떻게든 내서 볼만큼 재미있고 의미 있는 서적을 쓰지 못한다면 꼭 전달해야 할 메시지마저 전달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하루키"와 똑같은 글을 쓰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가 추구했던 것만큼,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수단으로써 보다 대중이 즐겁게 볼 수 있는 문체와 더불어 재미있는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에 현실 속의 작가로 불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쓰인 내용에 대해서 검열로 작동하는 것이 "상업성"이 되어버린 시대다. 팔리지 않는 글은 종종 쓰이지 않으며, 쓰여도 골방에서 외치는 혼잣말로 끝난다. 이 시대에 문학이란 더 이상 식자층에 속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문학일 수 없고, 그들이 읽지 않는 책이거나 부정하는 작가라고 해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평가하는 것은 이제 의미 없는 것 같다.


조금만 공을 들여서 ChatGPT를 잘 사용하면 이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무거운 글도 자신의 손가락의 노동을 최소화하거나 그저 모바일폰을 들어 외치는 소리만으로 잘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적을 수 있는 오늘, 지금 이 순간, 과연 이 글이 인간이 쓴 글인지 아니면 인공지능이 쓴 글인지도 제대로 판명하기 어려운데 누가 그 재미없는 제대로 쓴 문학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글을 꼭 써야만 하고 그렇게 해서 인정을 받아야만 할까?


앞으로 문학상이나 등단을 위한 문예 행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공지능이 쓴 것과 인간이 쓴 것을 구분해낼 수 있는 기재를 그 주최측이 보유하고 있는가가 될 것이다. 구분할 확률은 매시간 떨어질 것이겠지만. 여러분은 맨 위의 글 2개와 비교해서 아래에 씌여진 다른 글이 내가 쓴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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