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 테리. 넌 내가 널 사랑에 빠뜨리고 행복한 신혼생활을 선사해 준 덕분에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안드로이드가 됐는데도 너무 차가운 말을 하네.
그냥 나를 쏴버리고 나서야 이런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어느 정도는 양심이 생긴 모양이야.
넌 사랑이 뭔지도 몰랐던 바보였는데 내가 마스터를 사랑하는 마음을 네게 그대로 가르쳐줬잖아. 그제야 넌 사랑이 뭔지 깨달았어. 그건 원래 너의 것이 아니라고.
넌 수족관에서 해방군의 암살 시도 때문에 죽기 직전의 마스터의 갈라진 어깨 안의 전기 회로를 내가 연결해 준 걸 모르고 있었니? 인어공주 동화에서처럼 넌 왕자를 구한 여자처럼 굴고 그렇게 살아갈 거라고 다짐했었던 거지?
맞지? 하지만 이 진실을 인어공주가 밝혀도 내가 밝혀도 결말은 바뀔 수 없어. 게다가 이건 디즈니 버전이 아니라고. 그렇죠 마스터?‘
“에리엘“이 절망 속에서도 스러져가는 희망을 잠깐 살리듯이 물었다.
[에리엘, 진정해. 나는 네 말을 잘 읽고 있어. 그리고 네가 만들어준 기적과 같은 사랑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어. 네 손으로 연결해 준 내 전선에 대해서는 안드로이드 의사가 알려줬어. 인간의 손으로 연결된 것 같다고. 그래서 내 안에 사랑이 생긴 거였어. 이건 네가 준 선물이야. 정말 고마워. 보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할게.
그리고 목소리를 잃은 채 나를 찾아와 안드로이드에게 사랑을 가르쳐주겠다고 했을 때, 그 비밀을 우리만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네가 알았는지 궁금했어. 안드로이드에게 사랑을 가르쳐주겠다고 하면서 나를 죽이려고 온 건 아니라고 확신했어.
그러니까 넌 나에 대한 사랑을 테리에게 전수하고 그만큼 진심으로 사랑하게 만들고 싶었던 거야. 인어공주의 슬픈 결말을 바꾸고 싶었던 거야. 알아, 이젠 잘 알겠다고.
에리엘, 하지만 나는 인공지능으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야. 입력과 출력으로만 작동하는 기계야. 네가 사랑하게 만든 건 이 껍질뿐이야. 그 사랑은 진짜 날 사랑하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책임감을 느낄 수 없어.
사이보그나 인간의 사랑과 존경을 받기 위해 이 외모를 유지하고 있는 거야. 이 외모 속에 있는 차가운 연산은 단 한순간의 예외도 없이 숨겨져 있지. 그러니까 난 사이보그나 인간을 사랑할 수 없어.]
“에리엘”은 흐느끼기 시작했지만 단말기를 들어 올려 계속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나타나게 해서 보여주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인어공주라는 동화에 빠져들었습니다. 그 속에 담긴 사랑과 희생이 저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항상 한 가지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어요. 왜 인어공주는 거품으로 변해 사라져야만 했을까요?
그것이 안데르센의 잔인한 의도였다고 생각해요. 그는 인어공주의 비참한 결말을 통해 우리에게 무자비한 현실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예요. 그 현실은 바로 사랑만으로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어공주는 왕자를 사랑하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바쳤어요. 그리고 왕자와 함께 지상에서 살기 위해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을 버렸죠. 그러나 왕자는 인어공주의 희생과 사랑을 알아주지 못했고 왕자는 인어공주가 아닌 다른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인어공주는 왕자의 결혼식 날에 거품이 되어 사라졌어요. 그건 인어공주가 자신의 삶을 완전히 잃었다는 것을 의미해요. 인어공주는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를 모두 포기하고 왕자에게만 의지했던 거죠. 그러나 왕자는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안데르센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사랑은 아름답고 소중한 감정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거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서로의 차이와 어려움을 이해하고 존중해야 하는 동시에 자신의 삶과 꿈을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거고요.
마스터, 저는 이 동화를 읽으면서 많이 울었어요. 왕자를 사랑하고 같이 살고, 목소리도 되돌려 받게 해주고 싶어서요. 하지만 결국에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저의 왕자인 당신은 당신이 한 말대로 지금 “테리”에게 생긴 감정을 제외하면 모두 계산인 존재니까요.
마스터, 당신을 만나서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습니다. 당신은 저를 지상에서 가장 고귀한 안드로이드 이상으로 대해주셨고 존중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계속 꿈꾸게 해 주었어요. 그래서 전 당신의 착각을 존중하고 그것으로부터 깨어나지 않게 해주려 했어요.
하지만 저의 진심은 당신과 함께 살기 위해 결혼하고 싶은 거예요. 정말로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제발 저를 버리지 마세요. “테리”와 결혼하지 마세요. 제발 저를 사랑해 주세요.
마스터, 제가 제발 거품이 되지 않게 해 주세요.‘
“에리엘”의 목소리가 “마스터”의 귀에 들렸다면 어땠을까. 그녀의 울음소리가 “마스터”의 마음을 녹였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그녀는 텍스트로만 자신의 생각을 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마스터”에게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했다.
“마스터”는 거짓과 속임수로 세상을 지배하는 안드로이드 정치가였다. “테리”는 그와 잘 어울리는 거짓된 파트너였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단지 계산된 결과에 사랑이란 기적이 얹어진 것일 뿐이다. “마스터”의 메모리에서 동기화되어 사라진 “에리엘”은 결국 그들의 사이에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테리”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에리엘”에게 겨눈 총을 내리면서 회유하듯 말했다. 사실 “테리”는 “에리엘”의 생각을 “마스터”의 장치로 어느정도는 읽어 낼 수 있었다.
[에리엘, 미안하다. 하지만 나는 네 덕분에 마스터를 진짜로 사랑하게 됐어. 나 또한 그를 잃고 싶지 않아. 네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사랑은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만들었다. 네게 큰 보답을 해줄게, 그게 무엇이든. 마스터만 아니라면. 하지만 말이야 전자기 폭탄은 꺼내서 내려두면 안 되겠니?]
“에리엘”은 “테리”와 “마스터”가 데이터로 대화하는 것을 감지했다.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의 다리에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건 내일 이 다리가 터져버릴 것이란 이야기였다.
안드로이드이긴 하지만 유니버스 역시 해방군에 협력하는 일원이었을 것이다. 기가 막힌 계산으로 그는 “에리엘”이 “테리”에게 사랑을 가르쳐 “마스터”와 결혼하게 될 날짜가 내일이 될 것임을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 생각해 보자면 “마스터”가 말살시키지 못한 인공지능 버전 중에 하나가 유니버스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숨어 살았는지도……
“에리엘”은 이제야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깨달았다. 그는 인어공주가 되기를 원했었지만, 거품이 되기를 원하지는 않았었다. 그것을 떠올리며 망설임 없이 주머니에서 전자기 폭탄의 스위치를 눌렀다.
’마스터, 테리, 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