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불멸의 작품으로 남기보단 트렌디한 상품으로 남기를 선택하다
(표지 출처: Direct TV)
단평을 너무 시건방지게 남기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단 한 문장만으로 감상문을 요약해야 한다면 이 이상의 문장은 나에게서 나오기가 어렵다.
"지미 카멜"의 토크쇼에 "오징어 게임 시즌 3"의 홍보를 위한 게스트로 나가야 했을 배우가 "이정재" 배우가 아닌 "이병헌"이어야 했던 것인지를 총 6개의 모든 에피소드를 보고 나면 깨달을 수가 있다.
이 작품을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인 메시지를 지닌 작품으로 평가하고 그와 같은 메시지를 주기를 강렬히 원했던 평론가나 시청자는 왜 그런 것을 기대할 것 같은 인상을 풍겼는지 항의할 만도 하다. 일부 서방 매체에서는 전작들에 비해서 (메시지 면에서) 날카로움을 잃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내용 전반에 걸쳐서 가장 혐오스럽고 역겹고도 사악하기 그지없는 진정한 빌런은 사람이 죽든 말든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건 말건 간에 그저 자신의 쾌락과 쾌감을 위해 비인간적으로 대우하는 다름 아닌 VIP라고 불리는 황금 동물 가면을 쓴 이들이다. 공용어로 영어를 쓰고 있으며, 중국어도 나온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극의 그 시작부터 끝까지 단 한 명의 "프런트맨"의 동생인 "황준호"에게 동성 서비스를 요구했던 이 말고는 털끝하나 다치지 않고 파국의 끝판에도 무사히 탈출해서 사라진다. 시즌 1부터 줄기차게 내가 그들에게 씌운 혐의는 그들이 시청자인 우릴 비유하는 존재란 것이다.
이 비인간적인 목숨을 건 스토리를 보면서 자기 일이 아니니 그저 관전하며 평가하고 웃는 우리의 모습을 그저 좀 더 우화하하고 극단화해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거대 자본이란 힘 앞에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며, 그 또한 명성과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 작품의 감독과 배우, 관련자는 이 VIP 앞에서 게임의 말이 되기를 자청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결국 절묘한 비유가 잘 이뤄졌다.
극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각각의 삶에 떨어진 커다란 빚의 무게에 짓눌려, 뾰족한 경제적인 회생책이 없는 막다른 길에 처한 이에게, 비록 목숨을 걸고 진행하는 위험한 일이지만 승자로 남을 수 있다면 절대로 약속을 어기지 않고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는 불법적이라도 패자부활이 가능한 시스템이 있다면 좋겠다"다. 기타 데스 게임류가 이만큼 성공하지 못한 데에는 그 시스템이 실제할 것처럼 묘사된 수준이 이 작품만큼 높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계속해서 중독시키면서 극화를 따라오게 만들었던 메시지는 변함없이 이것이었고, 그 속에 일면 감동적인 메시지랄 수 있는 "나는 말이 아니다. 사람이다. 사람은......"이라는 절규이고, 모두가 서로를 무조건적이랄 정도로 속이며 살아가는 첨단 자본주의 사회에서 덜 큰 성인으로서 아직도 사람을 믿는 "성기훈"이 상식적이지 않은 "거대 시스템"에 당해 쓰러져 가면서도 저항하는 모습은 양념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의 거대 시스템은 사실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다. 죽이지 않겠다고 회유하거나 협박해서 각각의 행동이 일어나게끔 만드는 인물은 그 말과는 다른 행동을 하면서 눈앞의 존재를 속이거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 나면 바로 죽인다. 그것이 이젠 그저 극화로만 보이지 않는 것은 왜일까?
아직 성숙하지 않은 인간의 마음이랄 수 있는 것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 사회적으로 덜 큰 "성기훈"은 그와 같은 정의와 분별, 인간성이라는 것을 예전에는 가졌었지만 사회적으로 성공적인 자리에 위치하기 위해서 그 같은 "인간성"이라 할만한 것을 일순간에 버렸던 여러 성인을 비유하는 "프런트맨"인 "황인호"에게 농락당하고, 믿었던 "강대호"에게 치명적으로 배신당한 것만을 극중에 복수했다. 그 또한 을과 을 간의 투쟁이다.
아이를 가진 몸으로 게임에 참여한 "김준희"는 아이의 아빠인지 아닌지가 모호한 "이명기"와의 약간의 케미를 나누는 것처럼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게임 내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이중적인 인간성을 연기해 낸 "임시완"의 "이명기"는 마지막까지 시청자에게 헷갈림을 선사하는 수준 높은 연기를 언제나처럼 나이와 경력 따위 훌쩍 뛰어넘어서 잘 해냈다.
게임 중에 태어난 "김준희"의 아기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죽인 연기를 해낸 "강애심"의 "장금자"는 실제 그럴 수 있는 어머니가 정말 있을까란 의구심을 불러일으키지만 그런 의구심이 더 자라기도 전에 감독은 그를 가차 없이 퇴장시켰다.
부자연스러운 설정이나 장면이 포착될 것 같다 싶으면 바로 그 장면 자체나 그 장면 속의 인물을 아쉬움 없이 잘라내는 기법은 이제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성공적인 현대 극화의 클리셰라도 된 듯하다.
이 작품은 "이정재"의 "송기훈"의 인간적이고 감동을 주는 행위, "김준희"의 게임 중에서 태어난 갓난아기를 지켜서 밖으로 무사히 나가서 살게끔 해주겠다는 자신의 약속을 지켜내기 위해 돈과 자신의 생명보다 "명분과 대의, 아무런 죄 없는 어린이의 생명"을 더 아끼는 행위를 영웅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시청자의 관심을 훨씬 더 끄는 후일담 이야기는 그런 영웅적인 행위는 극화로 만들어지는 판타지로서는 훌륭한 것이겠지만, 그것만으론 불충분하단 사실을 제작진이 알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영웅시되는 행위가 제대로 결과를 가져오게끔 만드는, 비영웅적이지만 약간 개과천선한 듯한 현실주의자가 이 마무리를 해주는 것이 극화의 완결성과 매력을 더 높이는 방법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사실은 연쇄적인 살인을 방조하고 해온 자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인간성을 적지 않게 상실한 "이병헌"의 "프런트맨"은 자신의 가면을 벗고 "성기훈"의 딸과 그가 구해낸 갓난아기에게 주어져야 할 돈을 제대로 배달하고 자신의 책임을 충분히 수행함으로써 살아남아 영웅의 뜻을 이어가는 자가 된다. 동시에 감독의 페르소나가 이병헌으로 이전하고 주인공이 전환된다.
그런 그가 LA의 한 골목에서 "공유"가 한국의 지하철에서 했었던 딱지치고 뺨 때리는 일을 하는 "애플 TV"의 "디스클레이머"에서 다시 매력과 연기력을 뽐냈던 할리우드 여배우인 "케이트 블랑쉐"가 우정출연으로 나오는 것은 그만큼이나 "오징어 게임"이 종장에서 어필하고자 하는 위상이 무엇인지를 잘 드러낸다.
그럼으로써 시청자는 현실적으로 영향력 있는 세상의 변화를 이뤄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덜 자란 어린이와도 같은 존재인 "성기훈"보다는 보다 강력하고 현실적으로 뛰어난 술수를 가진 "황인호"와 같은 보다 성숙한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동시에, "넷플릭스"에 팔아서 글로벌 송출되고 있는 최고급의 문화 상품인 한국 드라마란 위상을 드러내놓고 보여줬다.
물론, 여기에 사족을 적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나는 이 글을 팔고 있는 유료 상품의 작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보다 심각하게 사회 문제를 지적하고, 비록 단순화된 비유임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전체에서 시청자가 빠져 있는 경제적 위기와 함정에 대해서 보다 날카로운 메시지가 바로 서고, 상상의 각 이음새에 보다 깊이 있는 사회적인 메시지가 또렷이 있었다면, 아마도 위대한 작품이란 평가를 했을 것이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우면서도 동시에 그렇게 진지했다면 이 작품은 처음부터 흥행하지 못했을 것이고, 넷플릭스에 팔리지도 못했을 것이다란 현실이 떠오른다. 작품에 대한 약간 부정적인 비판이나 비난의 후면에는 그런 비판이나 비난을 받지 않을 창작이 이뤄졌다면, 이미 전부터 흥행작이 아니었을 것이란 가정이 사라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랬으면 평론도 안했고.
오랜 시간 방영되어 오면서도 시의성을 많이 잃지 않았고, 칭찬을 하던 비난을 하던 보는 사람이 많고 반응이 많은 트렌디한 문화 상품이란 것에 갈채를 보내고 싶다. 이런 작품을 제대로 비판할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이만큼 재미있는 창작물을 써낼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만큼 극화 자체가 하루동안 쉼없이 단 한번에 이어서 6회차를 다 보게끔 만들 정도로 재미있다. 이이상의 작품만을 열렬하게 바래야 하는 시대일까?
이 감상을 하나의 그림으로 얼려본다면 그것은 아래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