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편까지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만들어진 작품처럼 보이다
(표지 출처: Screen Rant)
아주 극찬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볼만한 작품이었다고 느끼고, 서구 극화치고는 다소 특별하게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을 넣었기에 이에 대해서 글 "<올드 가드>-스키타이족을 소환하다(1)(링크 있음) "를 적어서 박제해두었다.
그 글에서 난 이 작품이 소재의 빈곤을 겪고 있는 서구 영화계가 동아시아를 소재로 쓰다가 지금은 중앙아시아로 역사의 범위를 확대시키면서 소재의 확장을 낳고 있다는 기대감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꼭 봐야겠다는 동기가 충분히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앤드로마케(샤를리즈 테론이 연기한 '앤디'의 본명)"와 서로 사랑했던 온전한 "동양인"으로서의 외모를 지닌 "꾸인"이 마녀로서 거대한 갑옷 안에 갇혀 심해에 버려져, 무한대의 익사를 겪는 고통으로부터 돌아온 것도 쇼킹했다.
그런데, 2편을 본 느낌을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냥 '1편만 보고 나서 보질 말걸'이란 문장이 떠올랐다. 인내심이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더 적어지는 것인지, 아니면 인공지능 등을 통해서도 쉽게 창작을 하는 이 시대에 생각하고 인간이 만든 스토리를 이해하는 과정이 심심해진 것인지. 긴장이 없었다.
물론, 올드 가드 1편에서의 가장 충격적인 장면이랄 수 있는, 모든 올드 가드원이 우선 한번 다 총에 맞아 죽은 다음에 다시 살아나서 적을 퇴치하는 장면과도 같은 신선함 가득한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전작만큼의 재미를 주지 못하는 이유기도 했다.
카자흐스탄은커녕, 한국의 서울과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 정도의 자금 지원 등의 인센티브를 줄만한 도시에서만 올로케이션을 진행한 것으로 봐서, 제작진이건 투자사이건 감독이건 스탭이건, 내 머릿속에 떠오른 기왕 "스키타이족"이야길 건드린 참에 촬영지도 그쪽으로 가자는 생각은 없단 얘기다.
어찌하다 보니 서양문명에 강력한 전사로서의 이미지를 가지고 덤벼들어 충격을 준 고대 최강의 무용을 자랑하는 여러 부족 중에 하나인 "스키타이족"을 그냥 넣었을 뿐인 것이다.
2편에서 이제 변변찮은 스토리 진행을 간신히 이어가는 듯한 극화를 보다 보니, 뭔가 치밀하거나 확장성 있는 스토리텔링을 하는 팀은 아니겠구나라는 실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바다에서 "꾸인"을 건진 이 작품의 끝판왕 빌런 "디스코드"를 맡은 것은 "킬 빌"이후 조용했던 "우마 서먼"이었다.
"샤를리즈 테론"의 "앤디"는 영생불멸의 인간답게도 2-30대부터 나이란 것은 먹어본 적이 없는 얼굴에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를 마치 "이온 플럭스"에 여전사로 출연했던 때로 돌아온 마냥 보여주며 열심히 사방팔방 뛰어다니고, "꾸인"과 "디스코드"와의 화려한 무술 대결로 주연임을 뽐냈다.
그렇게 보다 보니 아무 개연성이 없이 한국의 서울에 찾아가서 만난 가장 최근에 불사의 몸이 된 "나일"의 꿈에 나타나 "디스코드"에게 자신의 서재에서 죽음을 당하고 책을 빼앗긴 "투아"로 나오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에서 화교계 금수저 재벌 미남자 아들로 나왔던 "헨리 골딩"의 등장마저 심심한 이벤트다.
그 과정에서 “앤디”가 최초의 불멸자가 아니었고, 모여 있는 올드 가드 외엔 다른 불멸자가 없다는 거짓말을 왜 했는지 물어보는데 묵묵부답이다. 설정이 마구마구 뒤바뀌어도 그냥 굴러가는 스토리는 안스러울 정도다.
1편의 "꾸인"이 나타나서 압도적인 뒤끝을 작렬하면서 등장하는 끝장면을 다시 떠올려보고, 2편의 초반 장면에서 극심한 고통 속에 있었던 자신을 찾아내려고 제대로 노력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바람에 미워하게 된 그가 "앤디"를 쉽게 용서하지 않고 괴롭히며 집요하게 복수할거라 생각했었다.
물론, 스토리는 그 방향으로 진행되긴 하지만, 금세 두 사람은 이야기의 끝에 와서는 수백 년의 사랑을 망가뜨린 수백 년간의 고통을 간단하게 잊어버린 것 같은 "꾸인"의 심경 변화를 잘 못 드러낸다.
1편에서는 그래도 수백 년간 사랑했던 동성 애인 간의 서로에 대한 깊은 애정과 절규에 가득한 연기가 상상력의 저편으로부터 현실로 다가왔지만, 2편에서는 그런 상상따위는 열심히 하지 않겠다고 선언이라도 한 것처럼 평면적인 스토리와 연기로 범벅이 되어 있다.
애증으로 가득 찬 "꾸인"과 "나일"간의 싸움에서 "꾸인"이 간단히 제압되면서 별로 대단치도 않은 무력을 가지고 "앤디"를 괴롭히기나 한 말썽장이로 돌변했고, 인류 최초의 불사의 존재 "디스코드"가 나타나서는 최후의 존재라는 "나일"을 너무 간단하게 한 번에 찔러서 제압하는 것도 싱겁다.
오로지 "앤디"가 나타나는 무술 장면에서만 존재감 넘치는 액션씬이 보다 복잡하게 나올 뿐이다. 잠시 불사의 상태를 잃었던 "앤디"가 다시 불사 상태에서 반전으로 불사가 아님이 밝혀지는 "디스코드"를 상대로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맥없이 당하는 장면은 파워 그레이드의 불일치처럼 보였다.
물론, 여러 전작을 봤을 때 "우마 서먼"이 "킬 빌"에서 보여준 무적의 살귀같이 보였던 대량 살상의 검법과 총기 사용법의 이미지를 떠올리자면, 이 작품 내에서 그와 대등한 싸움을 할 존재는 아무도 없다. 그렇지만, 세월을 비껴간듯한 "앤디"에 비해 정통으로 세월을 맞은 "디스코드"가 너무 쌨다.
이 작품에서 개과천선을 하고 자신의 과오를 뒤집고자 "앤디"에게 자신의 불사 능력을 기꺼이 진심으로 선사하고, 그 결과로 일부러 자살이라도 하듯이 죽은 "터너"의 연기는 좀 설득력이 떨어져 보인다.
그러다 결국 3편을 기다리란 노골적인 내용으로 끝을 맞았는데. 사실 왜 3편 따윌 내가 기다려서 봐야 할까 싶은 반감이 들었다. "꾸인"과 "앤디"가 갑자기 사이좋게 변해서 "디스코드"를 발랄하게 찾아 나서는 장면도 도대체 인간의 심리 변화 속도를 뭐라 알고 있길래 극본을 이렇게 쓸까 싶었다.
하지만, 뭐 따지고 보자면 위에서도 이야기 한대로 자기 생각 없이 그냥 되는대로 막사는 시대에 있는 소비자가 꼼꼼히 생각하기는커녕 제대로 기억도 못하고 산다는 것을 이제는 문화 상품 제작자도 다 잘 알고 있는 시대이기는 하다. 스토리를 뛰어넘는 이미지와 음향 등이 선사되었다면 그만인 것이다.
이런 작품이 혹시 극찬을 받고 절대적인 수치로 각광 받기라도 한다면 이 시대를 의심하고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 정도였다. 개연성이나 필연성을 그냥 분위기로 대충 떼우고 극화를 만들어 가려면 코미디나 부조리극을 만들면 좋을텐데. 이건 나름 진지한 상업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뭔가 어설프기 그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글을 쓰면서 접한 문화 산물에 대한 기억과 느낌, 메시지를 추적하고 이해하려고 애쓰는 나 같은 무급의 영화 리뷰 쓰는 이가 이 시대엔 "문화 상품의 소비자가 쓴 불사가 될 수 있는 리뷰"를 남기는 차라리 진정한 "올드 가드"는 혹시 아닐까? 더구나 쓴 뒤에 그려서 얼리기도 하니까.
이제 "얼려 보기"의 마지막 편을 마치고 마지막의 그림을 아래처럼 달아본다. 점점 사라져 가는 텍스트 문화의 한 귀퉁이에서 기술의 눈부신 발달의 반대 방향으로 져가는 인간의 지적 역량의 쇠퇴를 바라보며, 아직은 완전한 바보는 되지 않았다고 외쳐본다. 나도 모르게 언젠가 그렇게 될지는 몰라도.
이제 이 연재는 종료합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