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철학 이전에 철학적 사유를 시작했다
소설적 사고라는 것은
또한 어둠에 널려 있는
빛 중의 하나다.
세상을 바라보는 문장...
선대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고 이를 옹호하고
일정한 방향으로 향하게끔
계속 이끌어 온 것들 중에 하나로
소설이 있다.
철학과 심리학, 그리고 사회학 이전부터
그 학문들이 다루는 것들의 방향과
나아가고 있는 길에 대한 발상의 단서를
쥐어준 것은 다름이 아닌 소설이었고
사고의 풍부함과 변칙적인 변화를
또한 자유의지의 발현을
지속적으로 유지한다는 면에서
인간이 자기 인생의 스토리,
이야기를 일관되게 바라보고
체계화하는데 있어 가장 역사가
긴 장르들 중에 하나가 바로 소설이다.
자신만의 생각을 본격적으로 만든 것은
어렸을 적 멋도 모르고 읽었던
동화책들과 더불은 다양한 소설들이었다.
소설을 접한 그다음부터
세계는 보이는 대로 단순하지만은 않은
다채로운 모습들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어둠과 빛의 단순한 구분으로부터
보다 복잡하고, 여러 가지가 맞물리는
세계... 투쟁과 사랑 그리고 다스림과 복종,
절망과 희망, 안정과 불안,
아름다움과 추함,
사실은 회색으로 뒤섞여 있는
선과 악의 색상.
지금의 이 세상은 그러한 것들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단순해지기 보다는
더욱더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가고 있다.
그 복잡함의 일부나마 풀어서
간직하고 사는 작업으로써
나는 글을 쓰려고 하는 것이다.
글로 써보지 않고서는
이해하지 못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이해하기 위해 쓰는 것이
소설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부여한 운명이고
성격이고 습성이다.
정말로 현명한 사람들은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처럼 최대한 침묵한다.
그리고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잘 알고 지내다시피 현명한 이들은
말이나 글 없이도 여러 가지를
잘 이해하고 파악해 나간다.
그리고 행동하고 결과를 만든다.
뭔가 글로써 이해해야만 하는 상황들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 글을 쓰고 있는
인간이 그냥 생활로서는 도저히 정확히
감잡을 수 없을 때,
또는 글이 되어서 전달되기 전까지는
이해시킬 수 없는 무엇이 내부에 있을 때다.
정말로 현명한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말과 글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오직 행동만이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빵만으로 살 수 없듯이"
우리는 행동이 가능한 생각만을 가지고
침묵만 하며 살아갈 수는 없다.
모바일로까지 확장된
인터넷 문명의 발달에 따라
긴 글을 피하는 문화가 이곳
사이버 공간에 횡행하고 있다.
일명 "포인트를 못 잡고 중언부언하는
글이나 말"은 그저 지루함만 배가시킬
뿐이지만
정제되고, 고민의 흔적이 담긴
긴 글에 있는 효용을 믿는다.
그런 긴 글은 놓칠 수밖에 없던 것을
다시금 붙잡아 오려는 끈질김이다.
그리고 읽는 이들을 힘이나 매력,
맺어진 환경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바로
타당한 생각을 공감하도록 만듦으로써
같이 행동하고 말하게 하려는
정정당당한 노력을 보여준다.
비록 지루하고 시간을 잡아먹게 만든다는
이유로 배척을 당하더라도
긴 글은 써져야 하고 읽혀야 한다.
일련의 서사적인 이야기를 통해
제시된 의견이나 질문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자신의 것과 비교하며,
개별적인 깨달음을 비교적 정확하게
흡수하여 만든 보편적인 것을
공감하면서 만나는 우리는
분명히 잡담과 가까운 접촉을 통해서
만나는 우리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보다 충분히 흡수해서 더
의미있고 삶에 도움이 되는 결과를
만들 수 있다.
결국 말 많은 사람, 긴 글 쓰는 사람은
다시금 이렇게 비유된다.
헤드라이트를 넓고도 강력하게 키고
보다 세세하고도 넓게 어둠을 밝히려고
애쓰는 사람.
동화를 알게 되면서, 나이를 먹어가면서,
소설이란 것과 만나면서,
머릿속은 때로는 소설가의 문체까지
통째로 동일화시키며 자신의 정체성을
만드는데 익숙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최근의 수백 년 간,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서구의 사회적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더
개인을 존중하고 개인의 가치에 연결된
자유로운 발상들이 문화와 문명을
풍성하게 하도록 했던 것은,
그리고 동양의 한순간 정체되어 버렸던
나름 광대한 문화의 층층 위로 덧 씌워올
정도로 밀도가 높아졌던 것은
바로 이러한 소설적인 사고와 텍스트로
전달된 내용의 전염성이 기여한 바가 크다.
그리고 점점 서양이던 동양이던
이러한 풍부한 사고의 시대가
대다수의 앞에서 막을 내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인류의 유산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이유는
바로 인간다움이라고 불릴 수 있는
존재하는데 필요한 삶의 의미를 사유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발상 하고,
깊이 파악하는 능력을, 이 긴 글,
서사적 문장이 키워주는
중요한 수단들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날이 그러한 유산의 생명력은
시들어 가고 있다.
경제를 중시하고, 경쟁을 통한 생존에
몰입하면서, 속도와 효율성이라는
두가지 단어에 사로잡히게 되어버린바
또 다른 지혜와 행복의 원천이
되어줄 수 있는 것들을 바라보지
않는데 익숙해지고 있다.
투입 대비 결과물이라는 공식이
이외의 모든 것들을 사라지게 하고 있다.
시간이 없고 투입해야 할 에너지도
한정되어 있다. 사실 너무 많은 것들 중에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도 정하기 어렵다.
하루하루 읽는 정보도 경제적인 가치가
있을 때나 재미있을 때만 시간을 들이며,
이제 글 자체가 가진 경제적인 것을
벗어난 가치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방대한 정보를 얻는데 상대적으로
훨씬 유리해진 인터넷 문명 속에서
문화 소비자로서의 고객들이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을 때만 쓰여진 글이 경쟁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중요한 것은 물론
경제적인 안정과 번영이지만...
그 안정과 번영의 근원이자
외면적인 치장물이기도 한 것은
바로 경제적인 것의 바깥에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간과되고 있다.
소설적 사고라는 빛을 만나는 것은
기계화되고 프로그램화되고 있는
우리의 인간성의 재생을 이루기 위함이다.
어둠 속에서 환한 빛을 찾기 위해서다.
자신이 지금껏 어리석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자꾸 들고 무기력감에 빠지도록
만드는 너무 복잡한 세상에 대한 절망이나
무관심에 자신이 빠져들고 있다면
자신을 다시 다른 존재로 구성하는데
소설은 무척 효과적일 수 있다.
새로운 도약을 위한 힘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금 이 넷 상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키우고 느끼고
새로운 빛을 자신만의 필터와 더불어
만날 수 있는 길이 될 수도 있다.
수많은 자극적인 사이트들이나 앱들,
단문으로 된 정보들을 접하는 것에만
몰두하다 보면, 순간 허전함이 다가온다.
삶을 충분히 채우기엔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아니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기 보다는 보통
"자신"을 벗어나 스쳐 지나가기 마련이다.
"자신"이란 자기가 갖고 있는 "이야기"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야기"의 앞 서간
형태는 다름 아닌 소설이며,
우리 몸에 흡수될 수 있는 기재이다.
시장 안에서 자기 자신을 팔아야 할 순간에
필요한 것은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단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이해하고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자신만이 만들 수 있는
서사적이고도 긴 이야기이다.
이건 자기소개서와는 별도로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에 앞서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낸 긴 글들을
읽지 않고서는 이를 구성하기가 쉽지 않다.
잘 만들어진 소설이라는 것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게끔 정해진 삶과는
조금이라도 다르게 살 수 있는 우리를
만들도록 해주는 것이다.
끈질기게 그것을 찾고자 하는 것이
바로 지금의 이 글쓰기이다.
과학자들만큼의 정밀함과
엄정함은 당장에는 없겠지만
과학도 가설을 만드는 과정이 있듯이
약간은 부정확하고, 근거가 부족해
보이는 긴 이야기들과 더불어
소설적인 방법으로 "자신"만의 빛을
만들어 가고자 하고 있다.
언젠가는 재미있고도 정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당장 오늘이나 내일은 되지 않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