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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Dec 05. 2015

<빛3_별>-별빛에 대한 사색

오래전에 별빛에 대해 가졌던 생각을 돌아보며

별 빛을 바라보면서

감상을 구구절절이

늘어놓을 수 있었던 시기는

이른바 감상이란

이렇게 나타내야 한다라는

형식을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던  시기부터였다.


그냥 솟아오르는

느낌만 풍부한 글은

뭔가를 전달하는데

도움이 되지않음을

알게 된 때부터이기도 했다.


그 전까지는 누군가의 감상문을

흉내 내는 글만 썼었다.


별에 대한 감상을 쓸 수 있게 된 뒤에

별에 대한 관심은 급속도로 사라졌다.

한번 쓴 소재에 다시 관심이 가긴

어려워진 탓도 있었다.


고전문학에서 자주 나오는 소재인

별 감상문 쓰기를 거의 완전히 중단한 때는

20대의 어느 가을날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사랑이란 감정과

여기에 거는 열망의 큰 부분도

더불어 같이 사라져버릴만한

일도 있었다.


만약 내가 기교 밖에 안 남는

글을 쓰고 있다거나

오로지 머리 속에서 만들어질 뿐

어떤 것도 정서적인 부분이나

감동 같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을

만들어 내지 않거나 못하고 있다면

바로 온전히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전달할 수 있는 시기를

지나쳐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랑은 자신의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타인에게 투사시킴으로써, 또는

자신이 가지지 못하는 것을

타인에게서 기대함으로써, 또는

자기를 소중히 여기는 감정이
타인에게서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민감하게 감잡을 때 이루어진다.


별로부터 정서를 찾지 못하게 된 것은

어쩌면 어른이 되어버린 것이고

자기 인생을 사랑에 휘둘리면서

살아가도록 놓아둘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별 빛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 또는 사랑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연스러운 마음의 자세를

어느 순간엔가 잃어버린 것은

당시에 이 사회에서 나의 위치를

또렷하게 자리매김했을 때였다.


평이하게 이야기하자면

너무도 가난하다 생각했고

자존심은 있었지만

자신감은 바닥이었다.


물론, 지금 돌아보자면

끔찍하게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먹고사는 문제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라는

자조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사회가 주로 이용하는

사회적인 위치 평가의 요소들을

종합했을 때 사랑을 제대로 이루어갈 수
없는 종류의 사람이 나라고 생각했었다.


그러고 나니 사랑은

급속히 내 안에서 증발했다.

그다음에 몰입했던 것은

일이었고, 밤늦게까지

일만 해도 충분한 듯한 기분은

일중독이 만들어낸 착각이었다.


그 일중독이 실은 나를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일면 고마운 증상이었지만

다른 방향으로는 독이

되기도 했다.


그 당시 내가 가진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다.


"외부의 그 누구도 설명해 줄 수 없는

내부의 상태, 그 무엇도 설명할 무엇이
되지 못하는 상태, 절대적으로 주관적인

그러나 자신은 알 수 없는..."

감정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쩌면 무감정과 무감동의 시기였다.


뭔가를 느끼지만 그것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하다라고 느꼈다.

그런 식으로 인간으로서 내가 갖고 있던

자연스러운 감정의 일부가 사라진 것이다.

당시에 나는 이것을 다시금 찾아보거나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만이라도

제대로 알고 싶어 했다.

그때의 나만이 사랑의 감정과 느낌을

잃어버리며 살아간 것은 아닐 것이다.

나와 영 딴판의 과정을 통해서도

잃어가는 패턴이 있을 것이다.

하루 중에 누구나 밤의 하늘을 보게 된다.

그리고 하늘의 별 빛이 어떤 의미로

이해되는가는 그 순간들과 그 사람들의

경우의 수의 총합을 넘어설 수도 있다.

각기 다른 이른바 "만감"이 교차한다.

그 만감 중의 하나인 무심함으로

일관하게 된 부류가 있을거란 말이다.



누구도 타인을 다 이해하진 못한다.

단지 공감하거나 닮았다라고 느낄 뿐이다.

그러나 모두가 보고 있는 별에 대한 감상은

때로 일치점을 보여준다.


공통의 언어로 대부분이 이해할 수 있는

정서적인 내용을 쓰겠다는 의지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없인 가능하지 않다.


사랑은 가장 원초적인

모두의 이해가 공통으로 만나는

하나의 꼭짓점이다.

별 빛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보통은 사랑이라는 감정과 연결된다.


그러나 사랑이 사라져 버리면서

별에 대해 부여하는 느낌도

점점 희미해져 가고


새벽녘의 어스름을 당겨오는 별을

무신경하게 바라보다 보니

의미 없는 빛이 의미 없는 어둠으로

빨려 들어가고 그저 사라지기만 했다.

별 빛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순간이 다시 다가온다면

그때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내게 사랑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라고

사랑은 의미 없는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작용의 원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그러한 무미건조함의

시기가 끝나고, 다시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만들고

사랑하는 아이가 태어나는 동안

간간이 다시 하늘을 바라보니

무미건조한 모든 감정을

다시 촉촉하게 적셔주는

대상이 별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별을 볼 때마다

느낀 감정을 적어볼 영감은

한동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별 빛도 이미 형광등과 텔레비전

그리고 수없이 반짝이는 스마트폰의

화면을 봄과 동시에 튀어나오는

스크린 속 화면의 빛들의 주변에서

아무런 의미 없이  버틴 지 오래다.


별자리를 공부하려는 마음도 사라졌다.

그리고 세계의 신비함과 다채로움을

이해하려는 자세도 사라져간다.


내가 이제 이해하고 싶은 것은

주로 유익한 정보와 지식과 지혜는

무엇인가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경제적인 가치로 전환되는가이다.


정서에 대한 이해는 어디로 갔는가?

이런 종류의 질문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여유로움이 지금은 잘 생기지 않는다.


고도 자본주의 사회라는

이 거대한 콜로세움 안에서는

보통 그렇게들 된다.


순수한 호기심을 잃어가면서 그렇게

본디 인간이 지닌 감정들을 조금씩

가볍게 느끼면서 무신경해지는 건 아닐까?

때론 두려움으로 한 편 한 편의 글을 쓴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의 별 빛 만큼이나

의미 없는 것이 되지는 않기를 기대해본다.

별 빛을 감정과 더불어 바라볼 수 있듯이

보는 대상을 통해 정서를 발견해나가는

그런 글들을 다시 써보고 싶다.


그러다 보면, 뭔가 잃어버린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하나씩 더 잘 알게 되리라.

나 자신에게나 누구에겐가 조금은 더

행복에 가까운 것들을 전달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나의 아이에게도

별을 보면서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있는지

어디서 듣고 읽은 이야기가 아니라

내 얘기로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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