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안 성가를 포기한 뒤, 의상을 입고 배치를 위해 무대에 서보다
* 브런치북인 "유니세프 후원자 합창단 참여기"에 실어야 하는 글인데 그냥 일반 글로 발행이 되어서 일반 글을 지우면서 다시 그 내용을 해당 브런치북으로 옮겼습니다. 이전 글에 좋아요를 남기신 분들께 양해의 말씀 올립니다.
(표지: Gemini 3.0 PRO로 그림)
무대 의상을 입고 실제 공연처럼 배치해 본다는 소식에,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난 토요일 아침이다. 길어진 손톱을 깎기도 전에 턱시도 상의를 걸치고, 장모님이 단을 잡아주신 바지를 입으려는데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다리미질 안 했어!"
부랴부랴 바지를 벗어 맡기고, 턱시도 상의에 검은색 라운드 티만 입은 채 손톱을 깎았다. 어색한 차림이었지만, 따로 슈트 가방이 없어 그대로 연습장으로 향했다. 아내가 급하게 다려준 바지까지 챙겨 입고 나선 길이었다.
수년간 신지 않았던 정장 구두에 억지로 발을 밀어 넣었더니 왼쪽 새끼발가락이 비명을 질렀다. 그동안 편한 신발만 찾아 신던 발이 애처롭게 울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나중에 리허설 때, 그 구두는 무대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정을 받게 된다. 발의 고생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연습장에 도착해 검은색 셔츠로 갈아입고, 나비넥타이와 파란색 행커치프까지 착용하니 공연이 눈앞에 다가온 듯 실감이 났다. 턱시도를 입은 단원들이 서로 멋지다며 덕담을 나누고, 가성비 좋은 단복 선정에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여자 단원들의 검은색 드레스도 패셔너블한 스타일에 대부분 잘 맞는 디자인으로 어울려 보였다. 의상 선정에 있어서 나름 다 일가견이 있고, 갓성비를 찾는 단원들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나도 턱시도의 선정 과정에 일부 참여했었기에 잔잔한 뿌듯함을 뒤로 몰래 느꼈다.
하지만 합창의 본질은 실력이다. 제본된 악보를 들고 연습 가능한 곡부터 차례대로 불러나갔다. 지휘자님은 어려운 곡은 제외될 수 있다고 하셨고, 드디어 그레고리안 성가 순서가 되었다. 수요일 연습 때 느꼈던 뿌듯함은 온데간데없고, 삐걱거리는 화음과 지적 속에 도파민 대신 불안감이 엄습했다.
베이스 파트는 그 어느 때보다 박자와 음정을 잘 맞췄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지휘자님은 "이 곡은 빼겠습니다"라는 단호한 결정을 내렸다. 반년 가까이 연습해 온 곡이었기에 시원섭섭함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누군가는 아쉬움을 표했지만, 당면한 무대를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앙코르곡에서도 내가 참여한 후반부 멜로디 파트가 맑은 여자 목소리를 넣는 것으로 변경되고, 다른 곡들도 난항과 변화를 겪었지만, 캐럴을 제외한 대부분의 가곡에서는 전원이 자신감을 얻은 듯했다. 평일 연습까지 불사하면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다.
대관 시간을 넘기며 의상을 갖춰 입고 무대 배치를 마쳤다. 남자 단원들의 의상에 대한 조언이 이어졌고, 내가 신고 온 구멍 자국이 있는 구두는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베이스 파트 단톡방에는 저렴한 구두 구매 링크가 올라왔고, 쿠팡 "웰컴 쿠폰" 덕분에 배송비조차 무료로 구두를 주문할 수 있었다.
모바일 쇼핑 시대의 풍경, 그리고 합리적인 소비를 추구하는 현대인의 모습이 엿보이는 순간이었다. 년에 몇 번 안 될 공연을 위해 최저가 구두를 찾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아쉬움과 기대가 교차했던 리허설, 하지만 무대를 향한 열정만큼은 모두가 같았다. 남은 기간 동안 더 열심히 연습하여 최고의 무대를 선사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사족: 지난번 신입 7기수 모임 때, 후기 내용을 적은 브런치 글을 공유했더니 대부분 관심이 없었지만, 한분이 그 내용을 다 기억해서 적은 것인지 여쭤보셔서,(일부는) 녹취를 사용해서 적었다고 말씀 드렸다. 글에는 기억이 어쩌고를 적었지만, 그건 디테일의 일부만 이야기한 것이다.
그리고 글 밑에 펀딩 버튼이 있는데 눌러야 하는건지(응원하기 버튼을 이야기한 것으로 이해)도 여쭤보셔서 전혀 누를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 돈을 받겠다고 쓰는 글이 아니다. 내가 하는 취미 활동의 궤적을 남기는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