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단복을 받고, 원형 배치로 연습하고, 늦은 신입 기수 회식 진행
토요일 하루가 순식간에 저물고 어느새 밤이 된 창가 앞에서 노트북을 열고 오늘 있었던 일을 복기하는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쓰는 것은 해가 다르게 체력이 많은 영향을 끼치는 일이라, 그저 시간이 있다고 바로 쓰이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 에너지가 회복되어야 글을 쓸 수가 있다.
이번 주 화요일에 있었던 3인의 베이스의 연습은 오늘 연습 중에 어느 정도는 발휘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적어도 한 번이라도 더 연습을 한 사람이니 나은 노래를 부름에 있어서 조금 도움 되었을 것이다.
1. 유니세프 후원자 합창단, 드디어 얼굴과 이름을 맞추다
토요일 오전, 여느 때와 같이 합창 연습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특별했다. 오후에 예정된 회식 때문인지, 아니면 공연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긴장감 때문인지, 공기가 평소와 달랐다.
2. 연습은 계속된다
지휘자님은 여전히 디테일에 집착하셨다. 무대 의상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구두 선택의 중요성으로 이어졌다. "통창 뒤로 빨간색이 보이면 안 된다"며 블랙 의상을 강조하셨고,
여성분들께는 굽이 있는 힐은 위험하니 피하라고, 남성분들께는 주름진 구두 대신 매끈한 옥스퍼드를 권하셨다. 심지어 "연주용 구두"를 따로 준비하라는 조언까지. 7cm 키높이 구두도 괜찮다고 하시니, 형평성만 지키면 된다는 말씀에 다들 웃음이 터졌다.
흥미로운 건 무대 배치에 대한 철학이었다. "파트끼리 붙는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말씀. 소프라노가 알토 한가운데 들어갈 수도 있고, 남성 파트 사이에 여성이 설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뷰'란다. 무대는 소리만이 아니라 시각적 연출도 중요하다는 것. 1시간 내내 서서만 부르면 관객이 지루해한다며, 안무와 시각적 트레이닝의 필요성을 역설하셨다.
연습은 절대적으로 유명한 팝송 한곡과 한국 가곡들을 오가며 계속되었다. 안무를 넣을 거라는 예고까지. 지휘자님의 머릿속에는 이미 완성된 무대가 그려져 있는 듯했다.
오늘 처음 연습하는 캐럴은 세밀하게 체크하셨다. 발음 하나하나를 짚으셨다. 베이스 파트가 소리가 안 나온다며 더 밝게 내라고 하시고, 알토는 묵직함이 사라졌다며 안타까워하셨다.
원형으로 앉아서 연습하는 시간도 있었다. UCLA 스타일이라며, 서로의 소리를 들으며 부르는 훈련이었다. "악보를 왼손으로만 들고 오른손은 넘기는 용도로만"이라는 지시에 따라 자세를 교정하고, 서로의 연주를 평가하는 시간도 가졌다. "철판을 깔아야 한다"는 말씀이 인상적이었다. 무대에서 관객의 눈빛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서로의 피드백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
나는 철판을 까는 것에 그 누구와 비교해서도 자신이 있을 정도기 때문에 그 이야기가 매우 반갑게 들려왔다. '무대는 좋아하는 장소이고, 이곳에는 그런 나와 같은 사람이 태반이 넘는다.
그런데, 서로 진짜 성향과 힘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란 문장이 머릿속에 그려졌지만, 서로에게 냉정한 피드백을 그냥 던질 수 있을 정도로는 친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철판 깔기에 앞서 같이 식사라도 하잔거다.
3. 드디어 신입 단원들 중 대부분이 얼굴을 마주하다
오후 1시 반, 색동저고리 앞. 원래 예약 인원이 20명이었는데, 두 분이 갑자기 독감 등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두 분 더 참여하면서 우여곡절 20명이 모였다가, 일이 급한 분이 하나 먼저 자리를 뜨고, 19명이 준비된 식당 안의 방에 모였다. 음식 주문이 하나 줄게 된 것에 양해를 구했다.
처음에 약간의 소란이 있었지만, 결국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보이즈 멤버 중에 한 분의 제안으로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기로 했다. 빠짐없이 19분의 모두 각각 개성이 넘치는 자기소개가 있었다. 몇분의 내용은 담겨 있지 않은데, 기억이 흐릿해진 탓일 것이다.
- 그분(베이스): 3년 전 노래에 대한 열정을 '각성'했다고. 나이 제한 때문에 올해가 마지막 기회였는데 운 좋게 합격했다며, 합창에서 느끼는 카타르시스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하셨다. 악평들을 이겨내며 '철판'을 깔게 된 경험담이 인상적이었다.
- 박노만 (나, 베이스): KBS 라디오 개국 시절 소년소녀 합창단을 했다는 아버지의 DNA를 이어받아 합창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 동네에서 9년째 일하고 있어서, 도움이 될 것이란 이야기를 하면서 이래저래 끼여서 홍반장 노릇을 하고 있다고 했다.
- 최연소 여자 단원 (소프라노): 우리 중 최연소인데, 뭔가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유니세프 후원자 합창단에 참여하는 것도 봉사하는 것이란 생각으로 참여했다.
어르신이 많은데도 와서 괜찮은가란 오디션 때의 심사위원의 질문에 회사에도 어른이 많다고 했단 이야기에 많은 분들이 웃었다.
자기가 가장 어리기 때문에 가장 열정적이리라 생각했지만, 나이 상관없이 넘치는 열정을 봤다고 했다.
- 캐나다에서 유학 했었던 여자 단원 (알토): 결석하지 않는 게 목표로, 한번도 빠지지 않고 연습에 참석할 정도로 열정적이다. 자리에서 이야기할 때 The Greatest Love of All을 오디션에서 불렀다고 했다.
- 중학교 영어 교사인 남자 단원 (테너): 어린 시절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고 교회 성가대 활동을 했다. 자연스럽게 음악과 함께 살아온 분.
- 타 합창단 경험자 남자 단원 (테너): 분당에서 오신다. 다른 합창단에서 3년간 활동하다가 코로나로 쉬었다가 유니세프 후원자 합창단에 합류. "합창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는 고백이 공감을 불렀다.
- 연령대가 높으신 여자 단원 (소프라노):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 중. 찬송가만 부르다가 다른 장르도 해보고 싶어 지원했다고. 생각보다 체계적이면서도 친근한 분위기가 좋다며, 모임을 챙겨주시는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셨다.
- 다른 남자 단원 (베이스): 교회 성가대 경험자. 떨어질 거라 생각하고 편하게 오디션을 봤는데 합격해서 놀랐다고. 벌점 안 받는 게 목표.
- 다른 남자 단원 (베이스): 노래는 좋아하지만 합창 경험이 없어 베이스 파트가 특히 어렵다고. 그래도 즐겁게 하고 있다며 긍정적인 마인드를 보여주셨다.
- 보이즈 멤버 중 한 분인 장신의 남자 단원 (베이스): 간단한 인사만.
- 보이즈 멤버 중 한 분인 남자 단원 (베이스): 혼자서는 못 했겠으나 좋은 분들과 함께해서 감사하다고.
- 다른 여자 단원(소프라노): 비올라를 배우다가 팔이 아파서 포기하고 합창을 선택했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 합창단이 코로나로 없어진 후 유니세프로 왔다고. 오디션 곡은 유튜브에서 딱 뜬 '첫사랑'이었는데, 고음을 질러서 합격했다는 이야기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 또 다른 남자 단원 (베이스): 합창은 50 평생 처음이라며, 중간에 위기가 왔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셨다. 20여 년 전 직장인 밴드 경험이 전부였는데, 문자를 받고 바로 지원서를 썼다고. "붙었다는 걸 믿을 수 없어서 문자를 한참 뚫어져라 봤다"는 말에 공감했다.
- 다른 여자 단원 (알토): 대학 때 통기타 동아리를 했고, 다른 합창단에서 오래 활동했다. 100명 넘게 지원했다는 말에 안 될 줄 알았는데 합격했다며, 두 합창단을 병행하는 게 힘들지만 할 만하다고.
- 마라톤이 취미인 남자 단원 (베이스): 나이 제한 1년 남았다며 마지막 기회로 도전했다. 다들 일가견이 있으신 분들이라 오히려 기가 죽는다며 겸손하게 말씀하셨다.
- 모자를 쓰고 안경을 끼신 남자 단원 (테너): 목소리가 괜찮아서 성악을 배우면 좋겠단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고 하는 분이고, 테너의 다른 분들의 실력이 워낙 출중해서 따라 부르는 것만으로도 꽤 괜찮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이 모임의 의미가 특별하다는 인상을 받고 있는 분인 듯했다.
- 이번에 남성 합창곡 한곳에서 솔로를 맡은 남자 단원 (테너): 오디션 참가 시에 30년 합창을 해왔다고 하니 단원들을 리드하는 역할도 잘 할 수 있는지를 문의해서, 그쪽으로는 잘하지 못한다고 했다는 말씀을 했다. 오랜 경험으로부터 오는 가창에 대한 부드러운 자신감이 느껴졌다.
- 그리고 국민 첫사랑 배우와 같은 이름을 가진 여자 단원 (소프라노): 오랜 교직 생활을 하고 계신 내용을 설명해주셨다.
식사 중에는 또한 오디션 때의 긴장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작은 강당에서 심사위원 2~3명 앞에서 부르는 줄 알았는데, 사람이 10명 넘게 앉아 있더라"는 고백에 다들 공감했다.
마치는 이야기를 하는 중에 보이즈의 맏형 노릇을 하시는 분께서 이 신입단원의 모임의 회장으로 나를 갑작스럽게 추천해서 당황했다. 그래서 "혹시, 반대하시는 분이 있으면 말씀해 달라"라고 했는데, 터프한 직장과 산업, 이제 초등학생 남아를 농구선수로 키우는 육아의 터프함을 떠올리며, 내가 한 커뮤니티의 "장"같은 활동을 잘하긴 어려울 것이란 현실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그 속마음을 누군가 들었는지, 그 제안을 하신 분이 회장을 하는 것이 어떠할지를 모두에게 물었고, 공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에서 지난번에 테너 한분과 솔로를 경합하다가 날아온 바위에 깨진 계란이 된 것 같은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잠시 떠올랐다.
잠시 생각해 보니 이 합창단과 이 신입단원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여 이 같은 모임을 제안한 그분이 누구보다도 모임의 "회장"을 맡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분이 내게 "회장"직을 제안했는데, 나는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또한 그분에겐 겸연쩍은 일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총무" 일을 맡겠다고 할까 하다가, 그건 또 명칭상 제안한 자리와는 왠지 먼 것이 되니 "부회장"을 하겠다고 했다. 중간에 회장이 있으면 같이 하는 다른 분도 있는게 좋지 않을까란 의견이 있어서 이를 따랐다.
그리고, "궂은일은 제가 할 수 있겠습니다만, 모임을 리드하는 일은 제게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고 나서 식사비를 각각 낼 수 있도록 가이드를 하고, 음식값을 카카오페이와 계좌 이체로 받으면서 계산을 하고 그다음 장소인 이디야 커피숍으로 이동하면서 이런 차원의 모임에 대한 봉사가 잘할 수 있는 일이란 생각을 했다. 굳이 말하자면 "서번트 리더십"이다.
4. 이디야에서의 솔직한 대화
회식이 끝난 후, 10분과 함께 이디야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 나온 이야기들이 더 솔직하고 재미있었다. 모임의 회장님이 되신 분께서 모두의 커피값을 내주셔서 부담이 없어 좋았고, 감사했다.
합창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베이스 파트 1은 인적 구성상 정말 힘들다", "파트 연습을 더 해야 할 것 같다", "음정을 잡는 게 생각보다 어렵다" 등 현실적인 고민들이 쏟아졌다.
어떻게 하면 더 잘 부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좀 더 프로페셔널하게 잘 부르는 합창단의 경력자 분을 통해서 "멘토 제도"를 운영해서 신입단원이 잘 부르도록 이끌고 지도하는 시스템도 들어서, 또 다른 신입 단원이 들어오게 된다면 해볼 만한 제도라는 공감도 얻었다.
그만큼 열정이 있고, 그만큼 잘 부르고 싶고, 듣는 이들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선사할 합창을 하고 싶은 욕심이 우리 모두에겐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그래도 즐겁다", "토요일이 기다려진다", "이렇게 좋은 분들을 만날 수 있어서 감사하다"라고.
모임이 더 생기게 되면, 회비 등을 거두게 될 수도 있으니 카카오뱅크로 모임통장을 만드는 것이 좋다는 제안이 있었고, 늦은 밤이 되어서나마 만들어서 통장 계좌를 알리니, 모임통장을 만든 뒤에는 회원을 초대해야한다는 조언을 주신 분이 있어서 7기 단톡방에 있는 분 모두를 초대했고, 반정도가 받아주셨다.
공연까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아직 완벽하지 않지만, 오늘 같은 시간들이 쌓여 우리를 하나로 만들고 있다는 걸 느낀다. 개인의 소리가 아닌 '우리'의 소리를 만들어가는 과정. 그 과정이 때론 힘들지만, 그래서 더 의미 있는 것 같다.
다음 주 토요일의 정기 연습 전에 수요일에 먼저 평일 연습이 하나 잡혀 있고, 참석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에는 좀 더 철판도 깔고, 좀 더 조화롭게 화음을 맞출 수 있는 이 모임에서 만들어진 마음의 근육이 연습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