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이 아닌 인간들이 사는 곳
역동에 살면서 느낀 점이 있습니다. 살아봐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는 걸요.
이 간판을 본 게 꽤 되었는데, 무려 9개국어로 쓰여졌다는 걸 이 사진을 찍으면서 비로소 알았습니다. 영어, 중국어, 베트남어... 나머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안녕하세요'가 아니라 '환영합니다'라고 쓰여졌어요. 이게 바로 글로벌 센스죠.
개 미용실 앞 매달린 고추. 김장을 준비중인 모양입니다. 김장은 유네스코 지정 무형 문화유산입니다. 공동체를 다지는 한국의 전통 문화라는 거죠.
집 앞의 '무슬리마'라는 식당에 갔습니다. 거의 주말에만 여는데 냄새가 기가 막혀서 들어갔죠. 의외로 이 동네 젊은 외국인들은 한국어를 매우 자연스럽게 구사합니다.
"사장님, 식사, 저희도 되요?"
"오 그럼요! 식사 되요! 들어오세요!"
헤헤헿.
메뉴를 보다시피 한국인은 거의 안 가는 곳이라는 걸 알 수 있죠. 영어도 없습니다. 자리에 앉으니 한국 안에서 마이너리티가 된 기분을 느꼈죠. 게다가 여성은 나 혼자. 그러나 한국인은 뭐든 먹는 종족입니다.
필라프와 케밥을 시켰습니다. 요거트도 한 잔 추가했고요. 양이 딱 맞았어요. 맛있냐고요? 궁금하면 오시등가...
계산대 아래 붙어있는 걸 얼른 찍었습니다. 물어보니 식당 사장님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다고 하더군요. 생각대로 중앙유라시아 사람들이 많이 와서 사는 것 같습니다.
담번에는 산딸기 쥬스와 샤슬릭을 먹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저는 웬만해선 사람을 잘 찍지 않습니다. 화낼까봐 무섭거든요. 그런데 이건 꼭 찍어야겠어서 남편에게 오른편에 서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잘라냈죠(ㅎㅎ). 어두워서 잘 안 보이지만 현판은 '경기광주민속5일장상인회'라고 적혀 있습니다. 예전엔 사무실이었지만 지금은 창고로 쓰이는 것 같죠. 그 옆의 외국인 노동자 두 사람이 주저앉아 있습니다.
한국의 이주 노동자들이 어디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잘 드러납니다. 지금 경안시장은 3일장이지, 5일장이 아닙니다. 그만큼 시간이 지났습니다. 민속장이라는 존재도 현대화의 저편으로 사라져가고 있죠. 근현대화가 미처 덜 된 자리, 그 자리에 이주 노동자들이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백이 거기밖에 없으니 달리 갈 데가 없죠. 현대화된 공간(예를 들어 서울)에는 이주노동자들의 자리가 없습니다. 여백이 없으니까요. 이 사실을 따져보면 이주노동자들이 왜 우익화되는지 간단하게 설명해줍니다.
이주노동자들의 자리잡을 수 있는 공간 자체가 근현대화가 덜 됐고, 오래 전에 우익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보고 듣는 것이 우익 논리이자 감정이니 당연히 표가 그쪽으로 갈 수 밖에요. 예전에 이자스민 의원이 비례대표 공천받았을 때 결혼이주여성들이 한국인 시어머니들에게 그랬다지요. "엄마, 엄마, 새누리당 찍어, 찍어."
식당 무슬리마도 그렇고 컨테이너 앞에서나 겨우 담배 피울 공간을 찾는 이주노동자도 그렇지만 이 작은 동네에서도 이주노동자의 계층 격차가 생겨나고 있음이 짐작됩니다.
며칠 전에 아파트 앞에 열린 야시장입니다. 10분만 나가면 마트가 널렸는데 왜 하는지 개인적으로 뭐 잘 모르겠지만 야간 사진 연습하기 좋을 것 같아 나가긴 했죠. 연습은 잘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야시장이 예전 장돌뱅이들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죠. 물건만 파는 게 아니라 놀이도 즐기고 음식도 사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죠. 여기서도 문화가 뒤섞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아파트와 야시장을 한 프레임에 담았습니다.
세계적인 도시란 게 이런 거죠. 여러 문화와 국적과 인종들이 뒤섞여 살아가는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베트남 카페 주인이 한국어로 귀여운 메뉴판을 쓰고 한국인 약사는 9개 국어로 '환영합니다'라고 간판을 만듭니다. 이주노동자들은 재래시장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호기심 많은 한국인 동네 아줌마는 한국어 메뉴 하나 없는 식당에 당당히(?) 밥을 사먹으러 갑니다.
(덧붙임 : 식당 무슬리마는 이곳입니다. 외국인들의 후기가 주로 있고요. 맛있었다고 쓰려다가 한국인들이 어정거리는 곳이 되면 불편할까봐 안 쓰기로 했습니다.
https://brunch.co.kr/@hyeyeunkimnvy9/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