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
하루하루 어디까지 가야겠는지 잘 모를 땐 요즘엔 Gronze 그론제 사이트를 참고한다. 일별 적당한 코스를 상세히 추천해 놨다. 이미 길을 지나쳐간 선배 순례자에 의하면 오늘 가는 티네오엔 사우나가 있는 숙소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오호라 사우나라? 솔깃해서 아침 먹으며 해당 정보를 친구들에게 흘렸다. 이미 피터는 그 숙소가 어딘지 알고 있었다. 50개 이상 침대도 넉넉하고 오늘의 목표는 바로 여기다 싶었다.
북쪽길에서 여정을 같이 시작한 네덜란드인 피터와 핀란드인 레이요와 함께 걸었다. 걷는 템포가 또 잘 맞더라. 내가 아저씨들보다 조금 느리지만 열심히 따라가다 보면 힘든 길도 어느새 지나있다. 확실히 혼자보다 둘이 셋이 더 영차영차하며 갈 수 있달까. 그래서 체력 좋은 남성분들과 함께 가는 길을 더 선호한다. 내가 조금씩 걸음이 성장하는 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특히나 오늘은 오르막길이 많아서 이게 마지막 오르막이길 속으로 바라면서 열심히 올랐다. 힘들 땐 사우나를 외치며!
난 다행인 게 일단 지나가고 나면 그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상처도 실패도 고난도 과거의 일은 금방 잊힌달까. 그래서 분명 힘든 길인데도 이미 지나왔기 때문에 지금을 맘껏 즐길 수 있다.
호텔에서 운영하는 숙소라 24시간 리셉션이 있었다. 무사히 체크인했고 우리가 1등으로 도착했다. 사우나를 확인하니 엄청 작았다. 사실 나는 뜨끈뜨끈한 사우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호기심이 컸다. 다소 저렴한 가격에 운영되는 숙소에 사우나가 있다니 어떤 생김새일까. 아무래도 저렴한 가격에 이미 숙소비에 포함된 서비스이다 보니 오후 5시부터 7시까지만 운영되더라.
일단 하루종일 땀을 흘렸기 때문에 샤워 먼저 하고 빨래 밥 먹는 것이 순서다. 오후 4시까지 메뉴 델디아를 먹을 수 있다고 해서 오후 2시에 맞춰서 호텔 레스토랑에 갔다. 많은 현지인들로 가득했다. 맛집이구나. 어제는 밥 생각이 별로 없어서 초콜릿과자만 몇 개 먹고 잠들었더니 오늘은 배가 무척 고팠다. 덕분에 요리 두 접시를 싹싹 비웠다. 물론 노 비노, 노 까미노(와인이 없으면 순례길이 아니다)를 외치며 와인도 세 잔이나 마셨다. 든든하게 식사를 했더니 속이 가득 찼다.
최근에 넘치도록 먹은 적이 흔하지 않아서 금세 메스꺼웠다. 한 10분을 앉아있다가 낮잠을 잤다. 아주 달콤한 시에스타였다. 일어나 보니 이미 사우나 시간이 끝나있었지만. 냉랭했던 사우나실에 뜨끈뜨끈한 온기가 느껴졌다. 한국이랑 똑같았다. 궁금증 해결 완료!
호텔에서 운영하는 숙소이다 보니, 하룻밤에 16유로. 메뉴델디아도 16유로. 금세 32유로를 썼다. 확실히 이 층침대도 삐걱거리지 않고 샤워실도 깔끔하다. 이것이 자본의 맛?
다만 빨래 말릴 데가 마땅히 없다. 물론 건조기 돈 주고 돌리면 깔끔한 일이다. 매일 입는 옷만 손빨래하니 양이 그렇게 많지도 않고 건조기에 돈 쓰는 게 제일 아깝다. 내일은 빨래를 달랑달랑 배낭에 메고 다녀야겠다.
내일은 거리는 짧지만 계속 산 오르막길이라고 한다. 프리미티보길은 확실히 대부분 숲길이라 초록초록하더라. 프랑스길보다 예뻐서 예쁜 풍경 보는 맛에 힘든 경사도 그저 오른다. 이것이 등산의 재미인 걸까.
자꾸 미리 스포 당하면 안 되는데 순례길은 정보의 바다다. 부엔까미노 앱과 그론제 사이트가 너무 잘 돼있다. 심지어 유럽인들은 가이드북까지 끼고 다닌다. 전혀 길을 잃을 일이 없다. 화살표가 애매한 것 같으면 바로 앱을 켜서 경로를 확인하기 때문이다. 8년 만에 걷는 길이라 그 사이에 디지털이 발전한 것이 피부로 느껴진다. 보다 안전한 순례길로 발달했음을 체감한다.
난 그냥 모르는 채로 부딪히는 게 재밌다. 물론 화살표가 중간에 없으면 너무 패기롭게 아무 길이나 향해서 가끔 길을 잃지만. 8년 전엔 그냥 생장 드 피드 포흐에서 주는 프린트 1장 가지고 노란 화살표 따라다녔는데 말이다. 그만큼 프랑스길은 노란 화살표를 거리마다 쉽게 찾을 수 있었다.
IT회사에 다닐 땐 디지털 전환이 화두였다. 모든 아날로그를 디지털로 바꾸자. 투명하고 효율적이니깐. 근데 그게 실무에서는 엄청 부담이고 기존의 아날로그 방식을 유지하고 싶은 실무자들을 많이 봤다. 디지털로 모두 바꾸는 게 무조건 편한 게 아니구나. 아날로그를 보완하는 역할로 디지털은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시작해여하며 아날로그, 디지털 함께 써야하는구나를 깨달았다. 순례길 속에서도 많은 디지털정보 덕분에 길은 덜 잃게 되었으나, 노란 화살표 따라가는 맛은 약해졌음을 경험한다. 아날로그를 사랑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날로그의 맛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요즘 걷는 프리미티보 길은 북쪽길보다 고유한 순례길의 맛이 아직 살아있다. 노란 화살표 방향도 잘 표시되어 있고 다음 마을 정보랑 몇 km 남았는지 안 알려줘서 좋더라. 그렇게 자세히 정보를 알려주면 그 km에 집착해서 딱 그 정도 거리만 갈 수 있는 힘만 내기 때문이다. 난 그냥 노란 화살표 따라 힘을 계속 내고 싶다. 내 힘을 숫자에 한정시키고 싶지 않달까. 같이 걷는 피터도 레이요도 이 부분에 동의했다.
사우나숙소를 향한 여정이었지만 결국 사우나는 이용 안 한 게 웃기다. 그래도 무사히 목표를 위해 잘 왔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그것도 1등으로. 명확한 목표를 설정한 달콤한 결과랄까. 내가 사랑하는 메뉴델디아도 넘치게 먹었다. 이것이 내가 나의 길을 즐기는 방법이다.
오늘 호텔에서 운영하는 숙소를 와보니 알겠다. 내게 필요한 것은 대단한 사우나가 아니란 걸. 그저 내 생각을 정리해서 글을 쓰고 영상을 편집해서 올릴 수 있게 인터넷 와이파이가 빵빵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내게 필요한 게 사실은 대단하거나 크지 않고, 뭐가 진짜 필요한 건지 알아가는 과정이 진정으로 소중하다. 그런 의미에서 내일은 빵빵한 와이파이가 있는 숙소를 만나길!
1) 여긴 알베르게는 안 터지고 호텔 리셉션에서나 터져서 소파 한 켠에 쭈그려서 쓰고 있음을 전한다. 결국 사진이 안 올라가서 내 데이터를 쓴다. 스페인 와이파이는 사진 업로드처럼 큰 용량 데이터를 일정 부분 제한하는 구조인 곳이 많더라. 여기도 그런 곳이다. 와이파이가 터져도 편하게 사진도 올리고 영상도 올리게 쓸 수 있는 데가 얼마 없다.
2) 와 근데 밤 아홉시가 다 되감에도 바깥이 훤하네. 지금이 유럽배낭여행하기 가장 좋은 시기임은 확실하다.
3) 지나가다 네덜란드 나막신으로 장식한 예쁜 전등이 있네 관심가졌더니 주인할아버지가 낮인데도 코드 꽂고 불 켜주셨다. 귀여우셔!
4) 매일 배낭을 지고 이사다니는 순례자는 달팽이가 아닐까. 길에서 달팽이를 많이 봐서 감정이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