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권이 전혀 없을 때
며칠 전 산 바게트랑 치즈, 하몽으로 샌드위치 만들어먹었다. 친구들 거 얻어먹을 땐 분명 맛있었는데 왜 내가 산 건 맛이 없지? 깔깔깔. 앞으론 바나나나 초코빵 정도로 간단한 것만 사 먹어야겠다.
오늘 비가 온다고 했는데 아니길 바랐다. 비 오는 순례길은 옷이 젖어서 춥기 때문이다. 심지어 마을 중간중간에 바나 화장실은 물론이고 쉴 곳조차 마땅치 않았다. 어쩌겠나 비가 오면 맞아야지. 이것도 순례의 일부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 이미 순례길에 익숙해져서 걷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북쪽길을 비슷한 시기에 시작해서 자주 만났던 피터와 레이요랑 오늘도 같이 걸었다. 싱잉 인 더 레인처럼 비 오는 거리에서 두 분이 폴짝 뛰시는데 귀여우시더라. 힘든 길도 즐겨버리면 더 이상 힘들지 않다는 걸 배운다.
다소 무거운 짐에 오른쪽 어깨가 10km쯤 걸을 때부터 아프더라. 별 수 있나. 바가 나올 때까지 걸었다. 바가 드디어 하나 나왔다. 하나밖에 없어서 순례자면 여기를 올 수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길에서 본 순례자들이 다 있더라.
따뜻한 라테 한 잔을 주문했다. 여긴 그란데 사이즈가 있는데 크기가 상당히 크다. 스페인에서 본 잔 중에 제일 컸다. 물론 가격도 2.5유로 다소 비싸지만 추운 몸을 녹이기 딱 좋은 따뜻한 음료였다. 비를 꽤 맞아서 그런지 손이 시렸는데 따뜻한 잔에 손을 갖다 대니 좋더라. 순례길 상품도 많이 팔아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한국어로 된 팔찌도 있어서 살 뻔했다. 어깨가 아픈 것을 생각하니 더 이상 짐을 늘릴 생각이 싹 사라졌다.
16km 걷는 짧은 하루였는데 이미 바에 도착했을 때 14km를 걸었더라. 바에 들어오니 다행히 비도 그쳤다. 내내 비를 맞고 걸었지만 그래도 비가 그친 게 어딘가. 순례길을 걷다 보면 어떤 힘든 상황도 결국 지나감을 알게 된다. 그리고 덜 힘든 상태가 되었을 때 그 순간의 소중함을 비로소 깨닫는다. 2km밖에 안 남아서 점점 환해지는 날씨를 즐기며 걸었다.
바에서 우리가 가야 할 알베르게를 구글맵에서 도착지로 설정하자 30분 거리였다. 금방 우리가 머물 마을 보레스에 도착했다. 표지판에 숙소에 체크인하려면 바로 가야 한다고 하더라. 구글맵만 보고 숙소에 바로 갔다면 헛걸음할 뻔했다. 이래서 디지털만 따라가면 안 된다.
바에 도착하자 체크인을 했다. 시립 알베르게였는데 하루 숙박비는 7유로더라. 앱에서는 5유로였는데 그새 2유로가 올랐다. 우리가 너무 일찍 와서 청소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셨다. 모든 말을 스페인어로만 하셔서 눈빛과 제스처로 알아들었다. 해가 나기 시작하자 신발을 벗고 발을 말렸다.
여긴 완전 기본 숙소다. 침대, 화장실, 빨래건조대, 전자레인지, 캡슐커피머신이 있더라. 어제 와이파이 빵빵한 숙소를 바랐는데 아예 여긴 와이파이가 없다. 2층침대가 빽빽이 방 하나에 들어차있었다. 특히 2층침대 2개가 나란히 붙어있어서 처음 보는 사람과 같이 있는 민망한 구조다. 물론 나는 옷걸이로 간이 커튼을 설치했다. 총 19개의 침대가 있는데, 하나는 3층침대로 되어있다. 3층침대라니 놀랄 노자다. 캡슐커피의 캡슐은 바에서 구매하란다. 바의 독점 비즈니스 모델에 감탄했다.
어쩌겠나. 다음 마을은 숙소 침대가 12개밖에 없어서 대부분 여기서 멈춘다. 15유로짜리 좋은 숙소는 이미 풀부킹이다. 7유로짜리 기본 숙소에 다들 머물 수밖에 없다. 심지어 슈퍼도 없다. 식당도 우리가 체크인했던 그곳 딱 하나다. 메뉴델디아를 저녁에 먹을 수 있다는데 프링글스 이런 거 준다고 한다. 바에 와이파이가 있는데 비 오는 날엔 잘 안 터진단다. 독점이 이렇게나 무섭고 강력하다. 선택권이 전혀 없는 하루다. 모두 한 숙소에 모인 덕분에 다른 순례자들이랑 대화를 나눠서 좀 더 친해졌다.
이런 날은 빨리 잠들고 내일이 어서 왔으면 한다. 물론 내일도 산을 넘어야 하지만 말이다. 숙소가 5개 있는 마을이 나올 때까지 또 아무런 선택권 없이 걸어야 한다. 저 산 너머엔 와이파이 잘 터지는 숙소가 있겠지? 분명 그럴 거야! 내일은 그래도 선택권이 있어서 다행이다.
*배고팠을 때 쓰고 낮잠을 잤다. 저녁 먹을 시간이라는 피터와 레이요 대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바까지 10분 걸어서 저녁을 먹었다. 비가 더 이상 안 와서 그런지 바에서 미약하게 와이파이도 되더라.
10명이 넘는 순례자와 함께 식사를 했다. 내일 오를 산의 높이에 대해 서로 다른 정보들을 보며 600m, 1,000m라 이야기하며 지레 겁을 먹는다. 스포를 멈춰주세요. 결국 다들 오르고 말 길이다.
밥 먹는 테이블에 같이 앉으면 누군가는 질문을 해야한다. 이름, 국가, 직업 빠지지 않는 세가지 질문이다. 사람들에게 직업을 설명할 때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을 이야기해야 하며 출판을 계획한다고 말한다. 그럴 때마다 나에게 스스로 주문을 외우는 기분이다. 꼭 해내겠다는 다짐을 되새기는 좋은 기회랄까.
오늘 요리는 고기도 안 들어갔고 콩죽에 계란말이(또띠야), 토마토샐러드뿐이었는데도 대단히 배가 불렀다. 와인은 물론이고 디저트로 아이스크림까지 즐겼다. 남은 또띠야는 심지어 싸왔다. 내일은 산길이라 길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11유로에 든든한 식사를 먹어서 내일 산에 오를 충분한 힘을 얻었다.
바에 가는 길은 쨍쨍했음에도 무척 길고 불만스러웠다. 한데 배가 부르니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비가 오는데도 짧고 풍요롭게 느껴졌다. 돌아오면서 든 생각은 독점은 좋지 않지만 그래도 저기 하나라도 없었다면 어쩔 뻔했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혼자라도 힘내서 운영해 줘서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바로 화장실 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른 기분? 아하 뭔가 내가 불만스러울 땐 배고픈 게 아닌가 먼저 돌아봐야겠다. 내가 배가 불러야 모든 상황들이 그제야 좋게 보이니 말이다.
어제 숙소가 호텔에서 운영하다 보니 오늘의 숙소와 갭이 커서 더 크게 변화들이 와닿은 게 아닐까 싶더라. 사실 오늘은 2층침대의 1층에서 잠든다. 그거면 됐다. 처음에 3층침대에 충격을 먹었다. 하지만 3층에서 자는 사람이 아무도 생기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얼른 이 닦고 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