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9일 차: 생일저녁식사는 메뉴 델 페레그리노

순례길 의사 등장

by 탱탱볼에세이

중간에 숙소가 많이 없어서 하루종일 걸었다. 오고 싶던 숙소에 왔지만 물집이 또 생겨서 오늘 길에 고생을 많이 했다. 5만 6천 보를 걸었더라. 한 30km 넘게 걸은 듯하다. 재택근무할 때 하루에 50 보도 안 걷다가 갑자기 너무 무리해서 걸으니 발이 힘들어한다. 죽기 살기로 자야 할 곳을 향해 걸었다. 물집이 커져서 절뚝거리며 도착했다. 샤워하고 물집을 터뜨리고 피부를 벗겨냈더니 죽을 맛이다. 그래도 내일이면 굳어서 조금 괜찮아지리라 믿는다.


다행히 숙소가 붐비지 않아서 다들 1층침대에서 잔다. 모두 다 1층침대를 자는 날이 제일 평화롭다. 17개 침대 중에 여자 넷, 남자 셋 7명이 오늘 여기 머문다. 따뜻한 담요도 많아서 얼어 죽을 걱정도 없다. 밖이 시끌시끌해서 알아보니 마을회관이랑 같이 붙어있어서 동네아주머니들이 춤추러 오셔서 정겹더라. 여긴 숙소비도 8유로라 합리적이다. 비자, 마스터는 기본이고 애플페이, 삼성페이까지 되서 놀랐다.


다만 샤워실과 화장실은 1층이라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할 때 왼쪽 발바닥이 닿지 않게 발레를 해야 했다. 경황이 없어서 샤워할 때 샴푸도 안 챙겨가서 클렌징폼으로 머리를 감았다. 생일인데 순례길을 너무 많이 걸어서 발 고문의 날이 아니었는지. 발에게 좀 미안하다. 하지만 중간 마을에 숙소가 없어서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중간에 화살표가 안 보여서 길을 잃어서 한 시간 더 걸렸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오늘 생일이라고 밝혔다. 저녁으로 한 명 빼고 가까운 레스토랑에 갔다. 순례자메뉴(메뉴 델 페레그리노)를 먹었다. 순례자메뉴가 있다니! 너무 반가웠다. 북쪽길은 생각보다 순례자메뉴가 없어서 있을 때마다 꼭 먹는다.


음식 주문할 때 6명이 주문할 메뉴를 취합했는데 칭찬받았다. 생일자의 특권이다. 각자 와인 한 잔씩 따르고 순례자들이 생일축하 노래를 크게 불러줬다. 사실 처음 본 사이인 분들이 많은데, 진심으로 축하해 줘서 고마웠다. 어제 숙소에서 같이 저녁을 먹은 두 명이 또 같은 숙소라 반가웠다.


오스트리아, 독일, 덴마크, 슬로바키아, 한국 다들 다양한 국적에서 왔는데 모두 독일어를 한다. 북쪽길은 신기하게 독일어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나는 거의 까먹어서 나서진 않는다. 다만 가만히 듣고 있을 뿐. 독일어를 배워둔 쓸모를 북쪽길에서 확실히 느낀다.


절뚝거리니 순례자들이 부축을 해준다. 숙소로 돌아와 오스트리아에서 크라우스 아저씨가 티트리오일도 뿌려주고 프로폴리스 크림도 발라줬다. 이렇게 순례길에서 순례자는 누구나 의사가 된다. 하하 맨날 이렇게 나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있다. 마음씨 좋은 사람들 자체가 선물임을 깨달은 하루다. 나는 언제쯤 누구를 위해 의사가 되어줄 수 있을까. 부디 나도 순례길에서 누군가를 도울 날이 오기를 바라본다.


내일은 조금만 걷고 발을 쉬게 해 주련다. 오늘 너무 욕심을 냈나 보다. 발에 불나도록 걸었더니 생일이 생일 같지 않았다. 그래도 좋아하는 순례자메뉴를 순례자들과 같이 먹어서 잊지 못할 생일이었다. 길에서 잠깐 스친 사이인데 식사를 하며 서로 안면을 트는 게 순례길의 매력이 아닐는지. 이제 바스크 지방에서 칸타리아 지방으로 넘어왔으니, 부디 순례자메뉴가 더 많이 있기를 소원할 뿐이다.

*도로인 길이 많아서 물집이 많이 잡혔다. 터널이 3개나 있었다. 한 터널은 진짜 길었다. 혼자 걷기 무서웠지만 많이들 개 산책시키며 지나가서 반갑게 인사했다. 30km 넘는 순례길은 되도록 피해야겠다. 험난한 여정이었다.



keyword
이전 09화포르투갈 순례길 14-15일 차: 평점낮은 숙소의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