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18일 차: 숙소 예약을 안 하면 생기는 일

멘붕 그 자체

by 탱탱볼에세이

도시에서 안 자고 싶어서 계속 걸었다. 나는 작은 마을에서 자는 걸 선호한다. 한 38km쯤 걸었을 때 며칠 전 같은 숙소에 묵었던 무리를 만났다.


지금 스페인휴가 시즌이라 다 만석이라 예약해야 한다고 하더라. 아차 싶었다. 난 전화통화가 없어서 예약을 못한 무방비 상태인데. 다가오는 마을에 알베르게가 꽤 있어 잘 수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다. 부엔까미노 앱에는 2곳이나 있었다. 하지만 가보니 모두 닫혀있더라.


지친 몸으로 6km를 더 걸어왔다. 여기도 침대 50개나 있는 곳이 2곳이라 잘 수 있겠지. 그런데 첫 알베르게가 이미 다 찼더라. 불안한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나. 시간은 저녁 8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당황하니 두 번째 알베르게 위치를 잘 모르겠더라. 일단 구글 맵에서 교회를 검색했는데 옆에 알베르게가 있길래 10분 정도 언덕을 올라왔다. 어머나 여기도 만석. 어디서 자야 하지...? 불안감이 엄습했다.


기지를 발휘해 구글번역기로 숙소관리인에게 물었다. 잘 곳이 없어서 그런데 바닥에서라도 잘 수 있겠냐고. 그렇다고 하신다. 나를 데려다주신 곳은 성당 입구 바닥이었다. 이미 동지들이 세 명이나 도착해 있더라.


휴 살았다. 혼자 여기서 잤으면 등골이 서늘했겠지만 동지가 셋이나 있다니. 다행이었다. 동지 두 명은 이틀 전 까미노 언덕에서 본 사이라 더 반가웠다. 알고 보니 둘이 스페인 산 세바스티안에서 온 엄마와 아들이었다.


아들인 이타가 물 뜨는 곳을 알려줬다. 평소에도 물을 엄청 많이 마시는 나는 한 병을 원샷했다. 바닥까지 드러난 갈증을 제대로 해결했다. 배고픈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저 잘 곳이 있음에 큰 안도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바닥이라도 없었으면 어쩔 뻔했는지 정말 아찔하다.


매일 짐을 메고 이사를 다닌다. 순례길이 인기가 좋아서 하룻밤 묵을 집을 구하는 것도 은근히 스트레스로 다가올 때가 있다. 이타가 내일 숙소를 전화로 예약해 줬다. 이렇게 민망하지만 순례자들에게 매번 도움을 받는다. 난 언제 누군갈 도울 수 있을까. 다음번엔 내가 꼭 도울 기회가 생기길.


이타는 한국에 관심이 많아 한글도 2년 전에 잠깐 배웠다고 한다. Kpop를 좋아한다고 해서 물어보니 아이돌을 주르륵 읊더라. 이달의 소녀의 루나(?)를 제일 좋아한단다. 나도 이제 나이 먹어서 bts까지 밖에 모른다고 했다. 오히려 이타가 나보다 더 케이팝을 잘 알 것 같더라.


이것도 잊지 못할 추억이겠지. 사진 한 장을 남겼다. 사진을 보내주려는데 이타가 카카오톡이 있다고 한다. 준비된 한국인이잖아. 이타가 한국문화에 관심이 많은 덕분에 내적친밀감이 상승했다. 케이팝에 감사하다.


저 멀리서 알베르게에 입성한 사람들끼리 즐거운 음악을 틀어놓고 바비큐파티를 하는 소리가 들린다. 우린 누워서 가만히 정시마다 울리는 성당 종소리를 듣거나 주변 목장에서 소들이 풀 뜯어먹을 때마다 나는 풍경소리를 듣는다.


침낭도 없지만 나는 우비 깔고 바람막이를 덮고 누웠다. 두 발 뻗고 잠들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감사한 밤이다. 여행을 떠나오면 이렇게 당연한 것이 새삼 소중하게 다가온다. 내일은 따뜻한 숙소의 안온함을 즐겨보련다. 어서 내일이 오기를.


keyword
이전 04화순례길 4일 차: 수도원에서 하룻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