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좋아
산토냐로 가는 첫 배가 9시고 숙소에서 5km 거리에 선착장이 있었다. 8시에 출발해서 열심히 걸어갔는데 아무리 걸어도 물집 때문에 도저히 정상적으로 걸을 수 없었다. 종종걸음으로 선착장에 9시 언저리에 도착했다. 이미 배가 사람들을 다 싣고 사다리를 걷은 상태. 첫 배를 제대로 놓쳤다.
허탈해하며 어제 본 숙소 친구들이 배를 타고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혼자 배를 못 타서 약간 민망했지만 저 배가 다시 돌아오길 기다리며 조그만 초코빵을 먹었다. 어제 같이 미사를 드렸던 또 다른 이탈리아인 엘레나가 멀리서 걸어왔다. 날씨도 좋고 비치도 좋아 맨발로 해변을 걸어왔다고 한다. 그녀의 여유가 나의 조급함과 대조되었다.
생각보다 빨리 배가 돌아왔다. 한 10분 걸린 것 같다. 2.5유로를 각자 냈는데 우리 둘만 타서 5유로에 배를 빌린 듯한 기분이었다. 잠깐의 여유지만 배 타고 도시를 이동하는 느낌은 매번 짜릿하다. 엘레나는 로마에서 태어났지만 28년 살고 프랑스 파리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파리에 산 세월이 더 길어서 이탈리아를 오히려 잘 모르겠단다.
유럽인들은 순례길 가이드북을 꼭 끼고 거기서 알려준 정보를 꼼꼼히 살핀다. 엘레나도 가이드에 따라 산토냐에서 볼 것들이 꽤 있다고 성당을 찾는다. 같이 성당을 갔는데 절뚝거리며 따라다니는 게 쉽지 않았다. 바에서 커피 한 잔을 하고 각자 길을 갔다. 엘레나가 먼저 도시 구경한다고 바를 떠났는데 내 커피까지 계산하고 갔더라. 예상치 못한 호의에 고맙다기 보단 놀랐다. 센스 있는 계산은 내가 계산했다고 말 한마디 없이 쿨하게 가는 거구나 배웠다. 다음에 써먹어야지.
노란 화살표를 따라가려는데 방향을 잘 모르겠다. 순례자 2명을 만나서 여기로 가는 거 같다고 하니 앱에서 방향을 봐준다. 덕분에 제대로 된 방향으로 향했다. 근데 시내 구경하다가 한번 노란 화살표를 놓쳤다. 구글 맵을 켜고 따라간다. 차들이 슝슝 지나가는데 풍경이 예뻐서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그렇게 오전 내내 걸어서 예쁜 해변가에 도착했다. 어제 룸메이트와 엘레나가 같이 걸어온다. 둘은 수영까지 했단다. 나도 그런 여유가 있으면 좋겠지만 먼 걸음을 가야 해서 잠시 멍 때리다가 일어나서 또 걸었다. 아까 방향 모를 때 만난 2명을 또 걷다가 마주쳤다. 절뚝거리며 걸으면 순례자들이 더 기억한다. 그 절뚝거리던 애가 여기까지 왔다니 대단하다 싶은가 보다. 좀 있다 또 보자고 하고 얼른 걸음을 옮겼다. 나는 물집이 발바닥에 가득해 걸음이 느리니 남들보다 더 서둘러야 한다.
가다 보니 투어리스트 오피스가 보인다. 처음으로 여행안내소의 도장을 받아봤다. 힘들게 걷고 도장을 받으면 얼마나 뿌듯한지. 뭔가 내 노고를 도장으로 보상받는 기분이다. 그렇게 다시 힘내서 시작해 본다.
14km 떨어진 구에 메스를 향해서 걸어본다. 해가 쨍쨍해서 더 걷기 힘들어졌다. 뒤따라오던 폴란드 그룹 3명이랑 이야기했다. 한국인 친구가 있던 아줌마랑 얘기가 잘 통해서 바로 페이스북 친구가 됐다. 더 쉬기를 원해서 길에서 또 만나자고 하고 먼저 길을 나선다.
걸어도 끝이 안 보인다.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나 궁금하지 않나. 요즘 같이 발이 힘들 땐 얼른 숙소였으면 좋겠다. 아프고 힘들어서 걸으면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다. 숙소는 하루밖에 못 묵고, 걷는 중간에 숙소가 별로 없어서 결국 걸어야 한다.
죽기 살기로 걷다가 성당이 보여서 모든 짐을 내려놓고 앉았다. 처음으로 신발과 양말을 벗어본다. 물집이 또 늘어났다. 왼쪽 새끼발가락의 피부가 완전히 벗겨져 불쌍하다. 구글맵을 보는 핸드폰 배터리가 없어서 보조배터리를 연결한다. 물을 마신다.
신발끈을 단단히 동여 메고 또 가본다. 걸어가는 곳마다 양이고 소고 말이고 동물이 많다. 그래도 지금 아니면 언제 이렇게 동물들을 떼로 보겠나 싶어 또 사진으로 남긴다. 지금은 잔디깎이 철인가 어딜 가나 잔디도 깎는다. 차 지나가는 소리 다음으로 잔디깎이 소리가 무섭다.
뒤에서 어떤 아저씨가 절뚝거리는 나를 보더니 다음 마을에서 머무는 게 어떻겠냐고 권한다. 그럼에도 나는 꾸역꾸역 구에메스에 왔다. 한국인의 투지, 긍지를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힘든 상황에도 끝내 해내고 싶다. 엊그제 생일식사한 순례자 친구들에게 오늘 같은 숙소에서 출발한 순례자 친구들에게.
구에메스까지 잘 온 것 같다. 내일은 진짜 비가 온다고 한다. 이 험한 길을 내일 왔다면 더 힘들었을 것 같다. 내일은 무리하지 말고 대도시인 산탄데르까지만 갈 예정이다. 급할 것도 없는데 함께 걷는 순례자 친구들을 또 만나고 싶어서 무리해서 걷게 된다. 다들 구에 메스까지 와서 오늘 28명 묵는다고 하는데 안면이 있는 친구들이 20명 정도라 반가웠다.
처음에 숙소 도착하자마자 신부님이 물과 쿠키를 가져다주셨다. 그리고 체크인하고 방까지 데려다주신다. 이런 환대는 호텔 가도 안 해주는데. 여긴 기부제 알베르게다. 7시 30분부터 이 숙소의 역사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 주셨다.
40년 전 처음 이곳을 알베르게로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협조해서 지은 곳이라고 한다. 정부, 지자체, 교회의 지원은 일절 받지 않고 순례자들과 이름 모를 익명 기부로 지탱해 온 것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계셨다. 저녁도 아침도 제공해 주신다. 이곳은 북쪽길 걸으면서 꼭 들려야 할 곳이라고 유명해서 왔는데 확실히 남다른 환대다.
한 호스피탈로스가 기부제 돈통을 내보이며 공짜가 아니라 기부제임을 강조한다. 매일 장을 보지만 가끔 너무 적은 기부로 꾸려나가기 어려움을 호소했다. 신부님은 너무 돈 내라고 강요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따로 호스피탈로스에게 주의를 준다. 기부제의 무게를 조금 느낀 순간이었다. 이 공간에 돈이 마르면 결국 닫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모쪼록 이 공간과 기부제가 잘 유지될 수 있도록 나도 돈을 좀 더 내야겠다.
사실 금액이 정해지지 않고 기부제면 나도 모르게 지갑을 최대한 닫는다. 금액이 정해진 숙소와 레스토랑에서는 군말 없이 돈을 척척 내면서 말이다. 기부제이면서도 흔쾌히 많이 기부할 수 있도록 좋게 유도하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