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도 순례길이었어
아침에 일어나서 건너편 마을 가는 배를 탔다. 아침 7시 반이 첫 배라고 했는데, 7시 20분에도 배가 있더라. 배는 5분 거리의 짧은 경로로 계속 왔다 갔다를 반복하며 사람을 이동시켜 준다. 배 요금은 1.1유로. 순례길을 걷기 위해 배를 타다니. 신기한 경험이었다. 알고 보니 북쪽길은 3번이나 배를 탄다고 한다. 바닷가 따라 걷는 북쪽길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어젯밤에 잤던 마을이 참 예뻐 보인다. 레미제라블을 썼던 빅토르 위고가 사랑한 곳이란다. 아쉽지만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마을을 뒤로한 채 노란 화살표를 따라 걷는다. 돌계단을 끊임없이 올라 산을 넘는다.
얼마쯤 걸었을까. 비가 세차게 오기 시작한다. 비옷을 꺼내 입는다. 어제는 배낭 부피가 커서 비옷 안에 배낭을 못 넣었다. 많은 걸 버려서 오늘은 배낭이 아담해졌다. 비옷에 배낭이 꼭 들어간다.
신발도 어제 걸었던 운동화가 축축해서 바로 버렸다. 양말을 신고 크록스 하나로 걷는다. 오히려 가볍고 걷기 편하다. 발목만 조심하면 될 것 같다.
비가 오면 발이 묶인다. 그냥 걸어도 짐이 무거워 발걸음이 무거운데, 비까지 오면 사실 어쩔 줄을 모르겠다. 하지만 순례길에서는 어쨌든 마을이 나올 때까지 걸을 수밖에 없다.
공복에 이른 아침부터 걸어서 금방 지쳤다. 오전 10시가 되어서야 산세바스티안에 도착했다. 산세바스티안은 스페인 북부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다. “칸타브리아의 진주”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으며 타파스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에너지 충전을 위해 핀초스 바로 향했다. 핀초는 꼬챙이란 뜻으로 조그만 빵 위에 식재료를 토핑 하여 꽂은 것이라고 한다. 바스크 지방에서는 타파스를 핀초스라고 부른다. 갖가지 맛있는 재료들로 꽂혀있는 다 맛있어 보여서 선택장애를 일으킨다. 2가지를 먹어봤는데 계속 리필을 부르는 맛이다. 1개당 2.2유로로 회전초밥뷔페에서 초밥 골라 먹듯 내가 먹고 싶은 핀초스를 조금씩 다양하게 즐기는 재미가 있더라.
바스크에 왔으면 바스크 치즈케이크를 먹어줘야 한다. 유명한 곳이 근처에 있고, 마침 11시에 오픈해서 오픈시간에 맞춰 바로 향했다. 1인 1 치즈케이크를 주문했는데, 알고 보니 인당 2조각씩 접시에 각각 담아주시더라.
따뜻한 카페라테도 곁들여서 마시니 비바람에 추웠던 것이 조금 해소되었다. 치즈케이크 비주얼과 맛에 감동했는데 배부른 상태에서 디저트로 먹다 보니 마지막엔 좀 느끼했다. 그래도 워낙 찐득하고 깊은 치즈의 맛에 반해 깔끔히 접시를 비웠다.
계산을 하려는데, 어제 프랑스 기차 사이트 회원가입을 도와드렸는데 아주머니들이 치즈케이크와 카페라테를 사주셨다. 오히려 도와드리며 회원가입하면 10% 할인쿠폰을 얻는다는 귀중한 정보를 얻었다. 생각지 못했는데, 감사히 얻어먹었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어 즐거운 순례길이다.
산세바스티안 대성당을 구경하고, 근처 데카트론을 향했다. 일행 중 스포츠타월을 잃어버리고 쪼리가 어제 끊어져서 새로운 스포츠타월과 쪼리를 구매하기 위함이었다. 최대한 간소화하면 할수록 이동하기 편한 순례길이다. 그럼에도 순례길을 건강하게 지속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물건들이 있다.
짐을 완전히 비우기도 완전히 채우기도 어렵다. 철저한 준비 하에 시작되는 순례는 없다. 어떻게 시작하든 걸으면서야 내게 넘치는지 부족한 지 진정 깨닫게 된다. 넘치는 건 덜어내고 부족한 건 채우면서 점차 나만의 짐의 규모를 만들어간다. 그렇게 나를 더 잘 알게 된다.
산세바스티안이 도시가 아름다워서 궁전에 갔다. 명망 있는 여왕이 세운 건물인데 튤립이 예쁘게 심어져 있고 건물 앞에서 탁 트인 바다뷰가 멋졌다. 비가 계속 내림에도 사진을 계속 찍게 만들었다.
아름다운 순례길을 계속 직접 걸어야하지만, 계속 내리는 비가 우리의 결정을 바꿨다. 30분간 버스를 타고 알베르게가 있는 마을로 넘어왔다. 원래는 10km 이상 걸어야 해서 4-5시간이 걸리는 거리인데 차를 타니 순식간에 도착했다. 스스로 순례자라고 선언한 지 3일도 채 되지 않아 버스라니.
비가 와서 더 걸으면 내일은 무리였다. 순례길을 걷다가 자칫 다치게 되면 멈춰야 한다. 순례길을 중간에 멈춰야 하는 상황을 원치 않는다. 계속 이 순례길을 걷기 위해서 처음으로 버스를 타봤다. 버스의 달콤함과 가짜 순례자의 오명에 마음이 편치 만은 않았다.
이전에 프랑스 길은 오롯이 완주해 보았으니 이런 버스를 타는 시도도 해볼 수 있다 생각했다. 어찌 됐든 무리하면 안 되는 것이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순례길을 각자 걷는 것일 뿐. 지난 순례는 버스 타고 마을 점프하는 건 가짜 순례자라고 구분 지으며, 오롯이 전체 길을 빠짐없이 걸어야 진짜 순례자라고 단언했었다. 이번엔 처음으로 버스 타고 이동해 보는 기존에 가보지 않은 길을 가봤다. 이제는 더 넓은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뭐든 절대적인 건 없으며 내 선택은 내가 책임지면 된다는 걸 배워간다.
체크인 시간 3시에 맞춰 딱 도착한 우리는 1등으로 숙소에 입성했다. 우리만 이 숙소에서 묵길 바라본다. 하지만 계속 새로운 순례자가 들어왔고, 24개의 침대 중 12개가 찼다. 대신 다들 이 층침대의 1층에서 잠들 수 있는 환경이었다. 1층에서 공평하게 잘 수 있는 것에 감사했다.
간단하게 버스를 타기 전 장본 재료로 샌드위치를 만들어먹었다. 스페인은 왜 이렇게 바게트가 겉바속촉인지 맛이 좋다. 샐러드채소 묶음, 마요네즈 범벅된 게맛살샐러드, 엔초비(멸치) 통조림을 올렸다. 어머니들과 다니니까 좋은 것 빠른 시간 내로 척척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신다는 거다. 그런 면에서 난 참 운이 좋다!
모든 잠 들 준비를 끝내자 목구멍이 아프다. 오늘하루 찬 바람을 많이 쑀나 보다. 타이레놀을 먹고 목에 스카프를 두른다. 오늘 숙소도 히터 같은 건 안 틀어줘서 찬 공기가 살결을 스치운다. 따로 담요나 침낭이 없어서 오늘은 매일 입고 다니는 잠바와 조끼를 덮고 잔다.
일행 아주머니들이 순례길을 이미 걸어보신 분들이라 같이 프랑스길 추억여행을 했다. 나는 사실 8년 전이라 어디가 어땠는지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주머니들은 3년 전에 걸으셔서 어디에서 어떤 추억이 있는지 상세히 기억하신다. 거기다 걸으셨던 마을 순서를 마치 지하철 노선도 외우듯이 읊어주셔서 대단했다.
상대적으로 나는 “좋았다”라는 단순한 감상만 남고 사진으로 되짚어볼 뿐이었다. 그나마 페이스북 페이지에 매일 남겨둔 사진들과 짧은 일기가 있어 다행이었다. 이번 순례도 더 열심히 기록해야 할 이유다. 그래서 지금 밤 10시에 가까운 시간, 다들 코 골며 잠에 들었는데 혼자 핸드폰으로 글을 쓰고 있다.
어제 순례길에서 있었던 일도 다시 한번 되짚어봤다. 걸어오는 길에서 멀리 까만 개 두 마리가 보였다. 주인아저씨도 오줌 싸듯 돌아서있다가 우리가 보이니 따라 나왔다. 우리 얼굴을 보면서 활짝 웃으며 주먹을 바짓가랑이 근처에서 열심히 흔들더라. 혼자서 그 길을 걷고 있었다면 황당한 상황에 어찌해야 할지 대처를 몰랐겠다 싶어 아찔했다.
하지만 우리는 네 명이었다. 그래서 우리도 당황한 기색 없이 활짝 웃으며 얼른 지나쳤다. 나는 아저씨가 시늉만 주먹을 휘두른 줄 알았는데, 다른 일행은 거시기를 꺼내놓고 흔들어 보인 거라고 한다. 학창 시절에 바바리맨을 한 번도 만나본 적 없었는데, 순례길에서 만날 줄이야. 그렇게 우리만 아는 순례길의 추억이 생겼다. 내일도 걷을 수 있는 데까지 걸을 계획이다. 내일은 비를 피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부디 햇볕과 바람에 바짝 마른 뽀송한 옷을 입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