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하반기 CTV 21부작 + 에필로그
*스포일러 있음
본 지 한 달도 더 된 것 같은데 아직 우바이 '라스트 댄스' (주제곡)가 입가에 맴돈다. 역시 청춘 로맨스의 성지 대만! 보는 동안 어찌나 중국어가 배우고 싶던지 입이 달싹거려서 혼났다. 방송 끝나고 대만 카우치서핑 후기를 읽으며 혼자 여행 계획까지 다 세웠다. 대만... 놓치지 않을 거야!
<상견니>의 주인공은 30대 직장인 여성 황위쉬안. 활기차게 회사생활 잘하는 것 같지만 2년 전 남자 친구 왕취안성과 사별했다. 아직도 그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해 틈날 때마다 남자 친구의 SNS를 보는 게 일상이다. 어느 날 익명의 발신자로부터 카세트테이프와 플레이어가 배달 온다. 테이프에 든 노래는 우바이의 '라스트 댄스'. 버스 안에서 듣다가 잠이 들어 깨어보니 1998년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여고생(천윈루)의 몸으로 타임슬립 한 상태다. 그리고 그곳엔 죽은 남자 친구와 똑같이 생긴 고등학생, 리쯔웨이가 있다.
[짜이찌엔, 왕취안성]
처음부터 극에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황위쉬안 캐릭터의 절박함이었다. 그녀는 남자 친구가 죽은 지 2년이 지나도록 혹시 부르면 문 뒤에서 그가 나오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남자 친구에게 문자를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 친구의 SNS에 모르는 여자가 남긴 댓글을 보고 남자 친구의 친구를 다그치기 시작한다. 그 여자 누구냐고, 혹시 바람피웠냐고. 그런데 그 이유가 너무도 뜻밖이었다.
친구: 황위쉬안, 네가 잊지 못하는 건 이해해. 그런데 대체 왜 왕취안성이 바람피운 증거를 찾는 거야? 설령 찾는다고 쳐. 떠난 지 2년이 되었는데 뭘 어쩌려고?
황위쉬안: 어쩌지 못하겠지. 그냥 좀 나아질까 해서.
친구: 무슨 뜻이야?
황위쉬안: 만약에 말이야. 왕취안성이 나만 사랑한 게 아니라면.. 그럼 나도 어쩌면.. 더는 그를 사랑하지 않고 지금처럼 계속 계속.. 그리워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러나 그 여자는 왕취안성이 황위쉬안에게 청혼하기 위해 고용한 이벤트 회사 직원일 뿐이었다. 그 후로도 그녀는 그리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더욱 사무칠뿐이다. 결국 다른 지역으로 떠나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동료의 권유에 집을 정리하며 비로소 무서운 감정을 직면한다.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없다는 묵직한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예전에 <위기의 주부들>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임신으로 짜증이 머리 끝까지 났던 가브리엘은 얼마 후 아이를 유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차피 원한 적도 없으니 잘됐다며 다시 신나게 일상을 살아가는데, 좋아하는 쇼핑을 해도 좀처럼 마음이 들뜨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감옥에 있는 남편이 보낸 깡패 같은 남자에게 떠밀려 풍선을 날리라는 황당한 부탁을 받는다. 풍선은 그녀를 떠난 아기의 영혼이고, 그걸 날림으로써 아픔을 인정하고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헛소리 같지만 끈질기게 달라붙는 남자를 퇴치하기 위해 가브리엘은 잔뜩 성이 난 채 풍선을 잡는다. 그러나 막상 날리려고 돌아서자 좀처럼 풍선을 놓지 못한다.
가브리엘: ...바보같아요. 난 이 아이를 원하지도 않았다고요.
남자: 네, 그랬죠.
가브리엘: 어차피 전 형편없는 엄마가 됐을 거예요.
남자: 그럴지도 모르죠.
가브리엘: ...남자아이였으면, 찰리라고 부르려고 했어요.
남자: 그래요?
가브리엘: 여자아이면, 라욜라요.
남자: 좋은 이름이네요.
한참을 가만히 서 있던 가브리엘은 조용히 풍선을 놓는다. 그리곤 점이 되어 없어질 때까지 하늘을 바라본다. 주인공이 아파하고 망가지다가 결국 마음을 추스리기까지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건너뛰지 말자. 함께 지켜본 시청자는 주인공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애틋한 운명의 굴레]
<상견니>는 색다른 구조로 설계되었다. 일단 타임슬립을 하면 자기자신이 아닌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의 몸에 들어간다. 2019년 황위쉬안은 1998년에 7살 자신이 아닌 여고생 천윈루의 몸에 들어간다. 나머지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남녀의 타임슬립 시점이 계속 엇갈린다. 1) 홀로 살아가며 왕취안성(=리쯔웨이)을 그리워하던 2019년 황위쉬안은 1998년대 천윈루로 타임슬립 해서 리쯔웨이를 만나 지내다 사고를 당한다. 2) 홀로 살아가며 그녀를 그리워하던 리쯔웨이는 어느 시점에 2010년 왕취안성으로 타임슬립 해서 황위쉬안을 만나 지내다 사고를 당한다. 1) 홀로 살아가며 그를 그리워하던 2019년 황위쉬안은 어느 시점에 1998년으로 타임슬립 한다.... 비극적인 돌림노래다. 필연적으로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나만 아는 사랑을 꾹 삼키고, 처음 만난 것처럼 상대에게 내 소개를 한다. 영화 <첫 키스만 50번째> 같다. 이 알 수 없는 친근감과 설렘 사이에서 극의 재미가 피어난다. 모든 걸 새로 시작해야 하는 답답함도 있지만 말하지 않아도 잘 통하는 두 사람을 보며 역시 짝은 짝이야, 하는 쾌감도 느낄 수 있다. 포기하지 않고 서로를 구하려고 계속 운명의 궤도에 뛰어드는 모습이 짠하다. 그럼에도 볼거리가 많고 주인공들 성격도 재밌어서 그다지 고구마 답답 전개는 아니다.
[서서히 스며드는 과정]
<상견니>는 로맨스, 스릴러, 미스터리, 판타지, 코미디, 청춘 등 많은 장르가 짬뽕되었지만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하지 않았다. 특히 감정선 속도조절이 탁월하다. 황위쉬안은 1998년 천윈루의 몸으로 타임슬립 한 후 당연하다는 듯 로맨스에 빠져들지 않는다. 1998년의 리쯔웨이가 왕취안성과 다른 사람이라는 판단을 한 다음부터는 관심을 꺼버린다. 대신 '여기 갇히는 건 아니겠지?' 불안해하며 빨리 2019년으로 돌아가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데에 몰두한다. 또 자신이 살해당할 것을 알고 로맨스보다는 단서를 찾는데에 집중한다.
당연하다. 상식적인 사람이 할 행동을 한다. 그래서 부담스럽지 않다. 오히려 로맨스가 안중에도 없기 때문에 더 로맨스에 적합하다. 사랑은 밀어낼수록 더 설레는 법이니까. 리쯔웨이와 티격태격 하며 지내다가 왕취안성의 흔적을 조금씩 발견하고 과거의 일기를 봤을 때의 쾌감이란! 드라마의 사랑은 갑작스럽게 시작할 수 없다. 충분한 여유를 두고 감정이 차근차근 쌓여야 한다.
[한 걸음 뒤엔 항상 내가 있었는데]
심쿵한 순간이 많지만 그중 기억에 남는 포인트 하나. '안전거리'다. 타임슬립 한 리쯔웨이는 대학생 황위쉬안을 발견하고 너무 기뻐 적극적으로 대시하고 직진 고백을 해버린다. 당연히 그를 처음 본 황위쉬안은 불쾌하고 이상한 후배쯤으로 여긴다. 그 후 각성한 리쯔웨이는 황위쉬안을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지만 거리를 유지하겠다고 말한다.
황위쉬안의 생일날. 친구들의 축하자리도 마다한 그녀는 밤늦게 남자 친구에게 온 연락에 기뻐 쪼르르 달려 나간다. 그런데 똥차 남친은 그녀의 생일은 잊은 지 오래고 사실 네가 바람피운 상대였다고, 원래 여친에게 돌아가겠다는 황당한 말이나 내뱉는다. 할 말을 잃은 황위쉬안은 터덜터덜 짐을 가지러 돌아온다. 한 편 케이크를 사 와 축하해주려던 리쯔웨이는 황위쉬안이 이미 남자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생일이 끝나기 한 시간 전 전화나 걸어본다.
황위쉬안은 하필 이 처량한(?) 모습을 발견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위해 마음을 쓰고 있던 리쯔웨이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다. 낡았지만 단단한 로맨스의 포인트! 내가 아닌 상대의 속도에 맞춰주는 배려심은 이렇게 빛이 난다.
[상처 받은 사람들을 위한 타임슬립]
사실 지금까지 언급한 로맨스는 <상견니> 매력의 극히 일부고, 스릴러나 판타지, 청춘성장 장르로 따로 놓고 봐도 엄청난 서사들이 있다. 그중 작가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한 부분이 청소년의 이야기다. 엄연히 말해 로맨스의 주인공은 2019년 황위쉬안과 1998년 리쯔웨이다.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다. 타임슬립 해서 리쯔웨이가 들어간 몸(왕취안성)과 황위쉬안이 들어간 몸(천윈루)은 비중 있게 다뤄지진 않는다. 그러나 사실 왕취안성은 동성애자란 이유로 부정당하자 목숨을 끊었고, 천윈루는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왕따를 당하다가 자살을 시도했다.
타임슬립은 이 인물들을 만나고 속마음을 듣게 한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타임슬립에 얽힌 비밀을 풀 수 있게 해 두었다. 추리와 위로를 자연스럽게 동시에 해내고 있는 셈이다. 타임슬립을 통해 세상이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직접 말을 건넨다는 점에서 <시카고 타자기>가 생각났다 (치즈미의 파먹기 시리즈 1편 참고! https://brunch.co.kr/@szimpatikus/38).
떡밥 회수와 마지막 결말, 그리고 에필로그까지 여운 덩어리인 드라마. 왠지 모르게 허전한 날, 누군가 그리운 느낌이 드는데 딱히 누군지는 알 수 없는 날, 어쩌면 우리도 이런 엄청난 사랑을 하고 돌아온 게 아닐까. 낭만적인 상상을 하게 된다.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