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단편집 <저만치 혼자서>
*소설을 읽으며 빌리 아일리쉬의 ‘What Was I Made For?’가 그렇게 찰떡일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https://youtu.be/cW8VLC9nnTo?si=BJYTmZNM7--DhDYw
그동안 번뜩이는 소재가 눈에 띄는 책들은 많이 읽었지만 슴슴한 맛의 한국 소설은 오랜만이었다. <저만치 혼자서>는 총 7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평범해 보이지만 사실은 맺힌 한이 많은 우리 주변 사람들의 인생을 돋보기로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듯했다. 가만 보니 단편들의 공통점이 있다. 소재를 하나 잡고,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의 인생을 그것에 비유하는 방식으로 풀어나간다.
고래와 명태
예를 들어 <고래와 명태>는 이리저리 흘러가는 명태의 모습을 주인공 인생에 비유했다. 고기잡이를 하던 주인공은 파도에 휩쓸리다가 어딘가에 겨우 정박한다. 고향 마을과 똑같이 생긴 북쪽 마을이었다. 졸지에 월북한 사람으로 몰려 목적이 뭐냐고 살벌하게 조사를 받다가 아무 의도가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풀려난다. 가기 전 네 고향 마을이나 그려보라는 주문을 받고 남쪽 포구마을을 한 장 그려준다. 그런데 남쪽으로 돌아오고 몇 년 후 느닷없이 이 사건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 주인공은 간첩죄로 십 년 넘게 옥살이를 하게 된다. 마지막에 주인공은 평생에 걸쳐 그린 포구마을 그림을 작은 수협회관에 일주일 간 전시하고 죽는다. 그림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글의 전반적인 정서처럼 허무하고 얄궂다. “(북쪽으로) 넘어갈 때도 밀렸고 (남쪽으로) 넘어올 때도 밀렸냐?”는 수사관의 빈정거림이 이 단편의 한 줄 요약이다. 자신의 의지는 하나도 반영되지 못한 채 이리저리 떠밀리다 끝난 한 인생이었다. 특수한 상황처럼 보이지만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감정 아닐까? 인생이라는 게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주변 환경과 사람들의 말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죽는 순간에서야 뭐 한 거지? 하기 딱 좋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 담담히 바다마을에 대한 묘사를 하다가 한 남자의 시선으로 글이 옮겨온다. 알고 보니 이곳이 그 남자의 고향이고 그는 십삼 년 복역 후 출소한 범죄자라는 시야 확장이 재밌었다.
저녁내기 장기
매일 장기를 두는 두 남자, 이춘갑과 오개남. 여기서 장기말의 처지가 꼭 주인공 같다. 주인공을 가만두지 못하던 세상처럼 상대의 장기말은 무자비하게 조여 온다. 주인공은 스러질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오개남은 산비탈 동네를 올라가 수레에 쓰레기 수거하는 일을 했다. 어느 겨울 수레를 밀다가 늙고 병들어 속도를 제어하지 못하는 사고를 낼 뻔하는데, 사람을 치지 않으려 방향을 돌리다가 벽에 부딪혀 본인의 머리가 깨졌다. 피하려던 노력과 상관없이 그는 해고 됐다. 개인 귀책사유로 판정되어 상해 보상금도 절반 밖에 받지 못했다. 피범벅으로 쓰레기를 뒤집어쓴 채 빙판길에 앉아 있는 꼴이 꼭 우리네 인생 같았다. 이런 일을, 이런 인생을 원한 적도, 특별히 원인을 제공한 적도 없지만 우리는 그냥 살다 보니 어떤 상황을 맞닥뜨린다.
이춘갑 쪽도 별로 나은 인생은 아니다. 뭣보다 인물 관계가 재밌었다. 헤어지지 않으려 이혼했지만, 결과적으로 헤어진 부부. 무슨 소리냐하면… 주인공은 외환위기 이후 엄청난 빚을 지고 하나 남은 아파트를 지키기 위해 아내와 합의 이혼했다. 금슬이 좋다고 할 것은 없었지만 법률적 이혼 사유도 없었다. 그저 채권단에게 아파트를 넘겨주지 않기 위해 위자료 명목으로 아내에게 명의를 이전한 것이다.
이혼 합의서에 도장을 찍어서 법원 창구에 내미는 일은 결혼의 본질과 별 관련이 없으며, 도장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닐진대, 서류는 제출하고 계속 같이 살면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라고 아내는 생각했다. (…) 도장을 찍던 날 아내는 아홉 살 난 아들을 끌어안고 울면서 ‘괜찮아. 집만 있으면… 도장으로 사는 게 아니니깐. 그렇지, 영수야?’라고 말했다. (…) 부부는 채권단의 눈을 피하느라고 별거를 시작했다. 그게 십육 년 전의 일이었다. 그 뒤로 법률적 이혼과 사실적 별거가 굳어져버려서, ‘마찬가지’라던 아내의 말은 거꾸로 마찬가지가 되었다.
오개남은 사고 나던 날 우연히 자신을 따라와 지금까지 정 붙이고 산 개를 유기견 센터에 맡기고, 이춘갑은 십육 년 전 헤어진 아내의 장례식에서 육개장을 먹으며 끝난다. 참 쓸쓸하고, 진절머리 나고, 공허한 상황을 잘 표현한다.
지난겨울 짬뽕값이 오천 원에서 육천 원으로 오른 뒤에 주꾸미가 조금 더 들어가기는 했지만, 국물 맛은 그대로였다. 이춘갑이 아내와 헤어지기 전, 십육 년 전의 맛과 똑같았다. 식재료를 우려낸 국물이 아니라 맹물에 인공 조미료를 풀어서 끓인 국물이었다. 국물 맛은 사나웠고, 목구멍에 불을 지른 듯이 화끈거렸다. 그 맛에 인이 박여서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국물 한 모금 넘길 때마다 지나간 모든 이물감이 되살아났다. 석양에 그림자가 늘어졌다. 이춘갑의 그림자가 이춘갑을 따라서 먹었다. 이춘갑은 먹는 그림자를 들여다보면서 먹었다. 그림자에도 젓가락이 있었고 움직이는 입이 있었다.
오개남은 1.4 후퇴 이후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태어났다. 남쪽에서 태어났으므로 남쪽을 열어젖히라고 이름을 개남이라고 했다는데, 뜬구름 같은 소리였다. ‘개남’은 ‘야’와 마찬가지였다.
이춘갑은 아버지의 생업이 무엇이었는지 뚜렷이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밥이라는 천형을 복역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 같았고, 태어났을 때부터 무기징역을 받은 것 같았다. 이춘갑의 아버지는 바다에 떠다니는 폐목을 주워서 팔거나 부두 하역 노동자, 연안 어선의 일용직 선원, 해군 창고 경비원을 했는데, 이것저것을 동시에 했고 나중에는 해군에서 버린 군화를 모아서 재생 처리했다.
찌꺼기를 쏟으면 바닷물 위로 시커먼 기름막이 펼쳐져서 번들거렸고, 그 위에 먼 선박의 불빛이 비쳤다. 불빛들은 기름막의 안쪽에서 돋아난 별처럼 보여서, 드럼통에 별을 싣고 온 것이 아닌가 싶었다.
고등학교 때 이춘갑이 3학년으로 올라가면서 헌 교복을 내다 버렸는데 이웃집 농부가 그 교복을 허수아비에게 입혀서 논에 세워놓았다. 교복에는 이춘갑의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밤이 오고 아침이 오고, 추수가 끝나고 눈이 쌓인 후에도 허수아비는 빈 논에 서 있었다.
이십오 년 전에 장기를 두던 노인들은 지금은 없다. (…) 지금은 다른 사람과 개들이 지나간다. 지나가는 것들은 지나가고 또 지나간다. (…) 호수공원 장기판에서 나는 해체되는 삶의 아픔을 느꼈다.
영자
가장 날카로워 기억에 남는 편은 <영자>였다. 주인공은 노량진 고시촌에서 9급 공무원을 준비하는 ‘구수생’이다. 아버지가 보내준 돈으로 9평 정도 되는 준수한 집을 마련했고, 룸메이트(동거녀)를 구한다.
나는 남녀 동거를 알선해 주는 인터넷 카페에서 영자를 만났다. 나는 방이 있었으므로 동거녀를 구하기가 수월했다. (…) 여자의 고향이나 가족관계, 장래희망, 취미, 월수입, 체중, 몸 사이즈, 무슨 대학을 나왔는지, 성형을 했는지, 무슨 직종 지망인지, 몇 수인지를 묻지 않았다. (…) 지하철 전조등이 어둠을 훑고 지나가는 밤에 몇 마디 말을 나눌 수 있고 몸을 잘 대주기만 한다면 동거녀가 지잡대건 지잡퇴건 나는 상관없었다. (…) 인터넷 카페에 올린 나의 제안에 ‘매우 생활적이고 개방적이다. 구준생들의 주거 문제와 성생활을 동시에 해결하는 방안이다. 널리 확산되기를 바란다’는 댓글이 여러 개 달렸다.
주거문제와 성생활을 동시에 “해결한다”. 정말이지 기능만 남은 사랑이다. 서로의 필요가 맞아떨어져 외로움을 충족시키는 수단. 겉포장지 다 떼고 남은 본질. 온전한 1인분의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준비생(공시생, 행시생, 취준생, 고3등)들의 삭막함을 이 단편을 읽으며 고스란히 느꼈다.
그리고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김서완 환자 에피가 생각났다. 망상증에 걸려 현실과 게임 속 드래곤 세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그도 공시 n수생이었다. 꾸준한 치료로 나아져 병동을 퇴원했으나 그가 할 수 있는 건 공부, 갈 수 있는 곳은 또 노량진밖에 없었다. 당연하다. 지금까지 해 온 게 있고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여기까지 온 건데, 갑자기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일을 하라고 떠밀 수는 없다. 합격할 때까지는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굴레다. 인간으로서 채우고 싶은 당연한 욕구를 거세당한 채 납작 엎드려 있는 기간이 길어지면 그 인생은 도대체 누가 책임질 수 있을까?
국사 과목의 최고 인기 강사는 김유사였다. 김유사는 요점 정리에 뛰어났고, 역사가 어떻게 9급 시험 문제로 바뀌는지를 명석하게 설명했다. 신흥과 쇠망이 부딪치면서 왕조가 바뀌는 시대가 문제의 지뢰밭이라고 김유사는 늘 강조했다. 김유사의 강의를 듣고 있으면 인간의 역사는 9급 시험 문제로 출제되기 위해서 전개되는 것 같았다.
이 세상 속으로 진입하지 못하는 많은 젊은이들을 나는 이 동네에서 보았다. (…) 제도가 사람을 가두고 조롱하는 모습을 나는 거기에서 보았다. 인간의 생존 본능을 자기 착취로 바꾸어버리는 거대한 힘이 작동되고 있었다. 날이 저물면 구준생 남녀들이 사육신 묘지에 와서 키스했다.
대장 내시경 검사
마지막으로 재밌었던 단편이다. 주인공은 비록 이혼했지만 딸아이도 있고, 좋은 회사에서 승승장구해 명예 부사장으로 이름만 올려 둘만큼 여유가 생겼다. 그럼에도 내시경 보호자를 요청할 사람이 마땅치 않아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부탁한다. 그 와중에 젊을 적 뜨겁게 사랑했던 여자에게서 몇 십 년 만에 짧은 편지를 받는데, 아들의 취직 자리를 알아봐 달라는 부탁이었다. 간호사였던 여자는 어느 날 미국의 큰 병원에 취직 자리를 얻었고, 별 말 하지 않았지만 주인공은 여자를 붙잡을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자연스럽게 이별했었다.
이 상황 자체가 웃겼다. 편지는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현실의 찌꺼기 같았다. <결혼 이야기>에서 나름 조용하고 아름다운 이별을 하려 했던 부부가 점점 숫자와 비난으로 서로를 깎아내리는 현실을 마주해야 했던 기분이랄까?
아무도 없는데, 아무도 없다는 것이 본래 그러한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았다.
“결혼은 물적 토대 위에서 가능하다. 신랑 신부가 안정된 수입의 바탕을 확보하는 일에 힘쓰기를 바란다. 사랑이 아니라, 연민의 힘으로 살아야 오래 살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하객들 중 나이 먹은 사람들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월롱동은 ‘물적 토대’는 먹고살 만큼은 이루었으나, 날마다 몸과 마음을 부딪치며 살아야 하는 일을 지속시킬 만한 ‘연민의 힘’을 길러내지는 못했다. ‘연민의 힘’으로 살아야 오래 살 수 있다던 S교수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쓰다 보니 블랙코미디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책이다. 곱씹을수록 참 버릴 문장이 없다. 툭툭 던지는데 그게 어쩐지 발을 따뜻하게 해 준다. 담백한 위로가 필요할 때 김훈의 책을 골라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