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시간의 주인이 되는 방법 : 즉흥성의 최소화
출근 전 텔레비전 채널을 우연히 돌리다 다니엘 린데만(독일 출신 방송인)이 기자와 조식을 먹는 화면에 시선이 멈췄다.
기자 : 10년 생활해본 입장에서 한국의
숨은 매력은 정말 이거다 이런거 있어요?
다니엘 : 사람들이 매력적이고 재밌는 거 같고... 일단 한국 사람들은 즉흥적으로 생활하는 거 같아요.
기자 : 즉흥적으로?
다니엘 : 네. 예를 들면 저는 약속을 따로 잡지 않았는데 갑자기 10분 만에 저녁 약속 3개나 잡힐 때가 있어요.
물론 독일인인 다니엘이 보기에 한국의 장점을 이야기 한 것이므로, 여기서 말하는 ‘즉흥적’이라는 건사람들이 비교적 활동적이고 흥이 많다, 정이 넘친다는 칭찬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는 그 ‘즉흥’ 이란 단어 속에서 발견했다. 계획되지 않은 자유로움이 왜 그토록 불청객같이 불편했었는지를. 갑자기 공짜로 누린 것 같은 그 자유가 내게 헛헛함만을 남기고 갔는지를 깨달았다. 그건 공짜가 아니라 수수료가 비싼 할부금 같은 것이었다.
즉흥적이라는 건 '비계획적'을 의미한다. 사전적 의미로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감흥이나 기분에 따라 하는" 으로 명시되어있다.
한 동안은 최대한 즉흥적으로 살았다.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기. 계획을 해봤자 그 걸 실천할 만한 정신적인 양분이나 육체적인 기운이 남아있지 않는 때가 한번 쯤은 있었을 것이다. 그냥 계획이 계획에서 그칠게 아주 불보듯 뻔할 때는 계획을 안세우는 게 낫다고 본다. "아이고, 00을 해야하는데 큰일이네." 밥상머리에서 혼잣말로 나오는 소리에 엄마는 말했다. "자꾸 뭘 한다고 그러니? 하려고 하지말고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라고. 한동안 그런상태였다. 일 뿐 아니라 인생 조차도 계획을 하고, 실천을 하고, 잘 되가고 있나 체크해서 환류하는 일련의 흐름에 익숙해진 나는 한국식 제도권 교육의 수혜자(피해자)다. 그러니 서른 살이 훌쩍 넘어서야 비로서 '즉흥성'의 진정한 해방감을 맛보았다. 대학때 소주와 색색깔의 싸구려 뻥튀기를 안주삼아 잔디밭에 앉아서 인생에서 두번째 소주를 마셨었던 적이 있다. 첫 잔부터 달았다. 즉흥성의 즐거움은 스무살에 느꼈던 첫 잔부터 취한 것 같은 달다구리한 소주 같았다.
단지 계획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말이다. 계획 따위가 없으니 실천을 할 필요도, 잘 되는지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었다. 나에겐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만 있었다.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기.(타인에게 피해가 없다는 전제하에) 하기 싫으면 하지 않고, 하고싶으면 하기.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아주 바짝 귀울인다는 측면에서 '즉흥성'은 삶의 새로운 원동력이 될때가 있다. 한 타임 쉬어가고 싶다는 생각에 깊이 빠질 때, '타임'이라고 외치고 잠깐 냉동고에 들어갔다 나오는 동안에 감독이 교체선수를 투입해 주었으면 좋겠다. 문제는 선수도 나이고, 감독도 나이고, 교체선수는 없다. 고등학교 때는, 대학만 들어가면. 대학교때는 군대만 갔다오면. 전역을 하고나면 시험만 붙으면, 취직만 되면. 취직을 하고 나면 승진, 결혼, 육아 등의 관문들이 사회적 규약처럼 줄줄이 사탕같이 목구멍을 침투해 들어온다. 그냥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 노력해서 가까스로 쟁취해야한다. 그럴 때 이따금씩 들어오는 '즉흥적인 무엇'은 내 삶의 속도를 늦추는 가드처럼 느껴지는 게 당연하다.
이런 장점이 '즉흥성'의 모든 것이라면 나는 찬성이다. 하지만 즉흥성은 어디서나 마찬가지이듯, 양면성이 존재한다. 비계획적인 사람에게 내포된 '여유로움'은 일정 시기가 지나면 '잉여로움'이나 '나태함'으로 변질되기가 싶다. 이런 잉여로움을 귀신같이 알아보고 달라붙는 불청객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건 비단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 시간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타인과, 나의 나태함을 외부적 원인으로 돌리는 내 자신. 둘 중에 누가 더 나쁜가? 이런상황이 오래 되면 머지 않아 나를 찌르는 자기비난으로 이어지는데, 나 역시 나만의 루틴(routine)을 잃어버렸을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우울하고, 힘들었던 때로 기억된다. 인생을 배 한척에 비유하자면 분명히 멋드러진 대형여객선은 아니었지만, 통통배 정돈 되었던 것 같은데 졸지에 행선지를 모르는 부표 신세가 된 것이다. 방향을 알지 못한채 망망대해를 떠도는 느낌이었다.
즉흥성은 유통기한이 짧다. 즉흥이 달콤하려면, 이것이 일상성에 기반해 있어야 한다. 누군가는 이것을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라고 할 수도 있고, 루틴(Routine)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의미는 비슷하다. 지금 한 순간을 보면 무작위로 대충 어디론가 가는 것 처럼 보일지 몰라도, 종국에는 방향성이 있고, 행선지도 있다는 것이다. 당장의 즐거움으로 소비되고, 휘발되는 것이 아니라 내 생의 어떤 모양으로든 남아 쌓여서 또 나를 만든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비로서 안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주 쉬운 것부터 삶에 루틴(routine)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앞으로 그것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