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천천히 뛴다고 생각하면 가장 빨리 뛸 수 있어
무라카미 하루키와 김연수의 공통점? 훌륭한 소설가, 에세이스트란 점 외에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엄청난 마라톤 애호가라는 사실. 42.195Km를 뛴다는 생각을 감히 한번도 해본적 없지만, 올해는 마치 30대의 새로운 국면을 맞은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호기롭게 마라톤을 도전해 보고자 했다.
평소에 운동을 좋아해서 종종 5킬로미터는 잘 달린 터였다. 물론 그마저도 실내운동을 즐겨하는 터라 헬스클럽의 트레이드밀에서 달렸던 것이 전부였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김연수가 그렇게 부르짓는 '러너스하이'같은 건 잘 느껴보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운이 좋으면 러너스하이를 느껴보고 싶다는 게 외면적 이유였다. 실질적으로는 작고 사소한 것에도 불쑥 올라오는 화를 다스리고 싶다는 동기가 달리기 입문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렇게 2019년은 달리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2월에 했던 모 마라톤 대회에서 하프를 2시간 17분대로 완주했다.(짝짝짝)
'너 좀 살만해졌나봐?' 요즘 내가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묻는 질문.
사소한,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중대한 어떤 일이 벌어질 때 스스로를 다그쳐 묻는다. 이 문제가 과연 네 인생에 중차대한 지장이 있는지, 그렇다면 이 불청객은 하루 이틀의 일인지? 지금 네가 화를 내는 이유는 정확히 무엇인지? 그 화의 원인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지? 그렇게 혼자 스무고개를 하게 되면 깨닫는다. 지금 이 모습이 최선은 아님을. 그렇게 현자타임이 오기가 무섭게 다시 출근하면 제자리로 무섭게 돌아온다. 생각보다 밥벌이는 고독하고, 짜증나고, 현자타임의 연속이고 성취감을 찾기 힘들다. 근데 나는 밥을 진짜 좋아하고 게다가 많이 먹는 편이니까 이걸 관둘 수도 없다. 어차피 이렇게 된 마당에, 기왕 나이도 한 살 더 먹었으니 좀 더 너그러워져야 할텐데 생각보다 눈에 거슬리고 마음에 부대끼고.... 스스로를 포함해 맘에 안드는 것 투성이다.
아직 잘 모르겠지만, 우선 달리니까 그런 부정적인 생각은 좀 사라지는 것 같다. 어떤 날은 정말 이번 생은 망했다 싶은 생각이 든다. 일이고 뭐고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데 그래도 주섬주섬 일주일에 한번씩 운동복 챙겨입고 나가서 우선은 달린다. 당장 숨이 가쁘니 인생의 의미건 뭐건 그런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거니와, 다리가 아프고 호흡이 거칠어지다가 눈앞이 흐려진다. 초반에는 솔직히 아무생각도 들지 않는다. 목말라 죽겠다. 게다가 1월부터 뛰기 시작했으니 너무 춥기도 했고, 좀처럼 맑은 하늘을 볼 수 없었던 미세먼지 낀 공기는 '달리기 입문자'에겐 악조건 이었다. 많이 달렸지만 그만큼 더 미세먼지를 온 몸으로 빨아들였을지 모른다.(미안해 내 몸) 달리면서 좋은 풍경도 슥슥 지나가지만 사실 옆눈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왠지 풍경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 뿐. 고지에 다다랐을 땐 그냥 제자리 걸음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피니시 라인을 통과한다. '하. 드디어 끝났다.' 안도와 함께 잔잔한 성취감이 몰려온다.
고작 몇개월 달리기를 했다고 해서 김연수 작가처럼 깨달음을 얻을 순 없겠지만 확실히 하나는 알게 됐다. 내 정신이 온전히 나를 지배하지 못할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내 몸부터 지배하는 것임을. 모든 운동이 그렇겠지만 그 중에 가장 이러한 생각과 맞아 떨어지는 것이 달리기가 아닐까. 세상에 어떤 일이 달리는 것만큼 정직할까 싶다. 힘든 세상살이 만큼 달리기도 쉽지 않았으나 그래도 아직 몸 하나는 내 스스로 컨트롤 할 수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달리지 않는 사람은 아마 모를거다. 앞으로 언젠가 풀마라톤을 하는 날이 올 수도 있고(아닐 수 도 있겠지만), 무릎이 허락하는 한 꾸준히 달릴 수 있는 건강이 내게 주어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