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랭보 Jun 25. 2018

그렇게 매일을 쓴다

12주간의 글쓰기 도전을 마치고



내 삶은 글에 빚졌다. 예고 없는 고통의 시간대를 글을 붙들고 통과했다. 크게 욕망한 것 없고 가진 것 없어도 글쓰기 덕에 내가 나로 사는 데 부족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은유 '쓰기의 말들'중-



때는 3월 8일 여성의 날이었다. 여성의 날을 맞아 좋아하는 작가들이 북토크를 하는데 같이 가보지 않겠냐는 후배의 제안에  조금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도무지 답이 있는 것 같지 않는 회사 일, 사람과 일에 지칠대로 지친 마음,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막막한 서른 넷의 3월에 나는 내게 실종된 무언가가 바로 '무엇'인지 발견했다.


회사원으로 살아간다고 해서 하고싶은 일을 하지 말란 법은 없었다. 커리어로써는 원하는 일을 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고 항상 미련이 남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하고싶은 일'과 '해야하는 일'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정도로 나이를 먹긴 했다. 한편으로는 해야하는 일을 함으로써 밥벌이를 옹골차게 하고, 자신을 책임지는 성인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일이 좋기도 했다. 그런데 욕심이 생겼다. 돈벌이를 위한 일이 아닌 가슴을 뛰게 하는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한 없이 가라앉는 몸뚱이와 정신상태를 개조해보겠노라고 몇 년간 모든 에너지를 쏟았던 운동도 마침 시들해진 타이밍이었다. '텅비어 진공상태가 된 머리에 기름칠을 해보고 싶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글쓰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무작정 써야겠다는 다짐만(!) 굳게 했다. 하지만 글 밥을 먹는 사람도 아니고, 단순히 취미로 삼아 글을 쓰기에는 동력이 미약했다. 예전처럼 언론사 합격을 위한 글쓰기가 아니라 특정 주제를 잡고 쓰기도 애매했고, 단순히 일기를 쓰자니 소재도 부족했다. '일기는 일기장에.' 같은 뻔한 말을 들을 만한 글들 밖엔 쓸 수 없었다. 집-회사의 반복된 일상에서 건져올릴 만한 싱싱한 이야기가 있을리 만무했다. 당장에 할 수 있는 건 그냥 북토크를 마치고 서점에서 구매한 은유작가의 '쓰기의 말들'을 읽고 또 읽는 일 뿐이었다.


그러던 중 평소 좋아했던 작가의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글쓰기 온라인 모임' 맴버를 구한다는 내용을 보게 됐다. 과거 매거진 페이퍼의 편집장이자, 다수의 에세이, 소설을 출간한 황경신 작가님이었다. 직접적인 글쓰기 티칭은 아니었지만 12주동안 60여명의 생면부지의 사람들끼리 페이스북 비공개 그룹에서 매일 한 편의 글을 썼다. 게다 참가비 5만원을 내고, 12주의 이야기 여행에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시간을 지켜 글을 쓰는 사람에게 참가비 전액을 돌려주겠다는 제안도 너무나 솔깃했다. 그 미지의 공간에  매주 작가님의 제시하는 글쓰기 팁이 주어졌다. 주제가 정해지기도 했고, 형식이 정해지는 주도 있었다. 함께 글을 쓰는 사람들끼리 간단한 코멘트를 달기도 했다. 각자의 모양대로 어딘가에서 하루를 살아내고 글을 쓰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래서 매일이 기대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날은 도무지 글을 쓸 기분이 아니라 '내가 이걸 왜 시작했나.' 후회와 부담이 밀려오기도 했었다. 그럴수록 꾸역꾸역 썼던 것 같다.


 마지막 주의 과제가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주제는 '나의 이야기'. 슬프고 힘들고 괴로웠던 일을 떠올리고 그것에 대해 쓰는 것이었다. 나는 혼자 마음에 품고 가족에게 조차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썼다.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를 써도 될까 잠시 망설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보다 아픈 이야기는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쓸 수 밖에 없었다. 4년 전 떠나보낸 막내동생에 대한 이야기 였다. 아주 오랫동안 쓰는 일조차 너무 아픈 것이어서 속에만 품고 살았었다. 마지막 주,  5일간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썼는데 어떤 날은 조금 울기도 했다. 내 글을 쓰면서 울고,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다가 또 울었다. 도대체 글을 쓴다는 게 무얼까? 글쓰기의 의미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게 됐다. 그리고 저마다 상처를 품고사는 인생에 대해서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5만원을 돌려받았다. 4월에 시작되어 공교롭게도 글쓰기 프로젝트가 끝난 지난 금요일은 막내동생의 기일을 이틀 앞둔 시점이었다. 의도치 않았는데 이번 프로젝트는 작은 우연으로 시작되어 삶의 필연과 같은 의미있는 경험이 된 것같다. 작가님께 돌려받은 5만원의 참가비를 쓸 용처를 어렵지 않게 생각해 낼 수 있었다. 동생을 보러 다녀왔다. 물론 5만원 어치 술과 음식이 다 내 배로 들어간 것은 좀 안타까운 일이긴 하다. 고작 12주간 매일 글쓰기를 통해 치유를 경험했다고 하면 좀 우습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막 글쓰기를 통해 남아있는 내 삶의 가능성을 희미하게나마 보기 시작한 것 같다. 어떤 글이든 매일 12주간 썼던 나에게 수고했다고, 올해 상반기에 한 일 중 가장 대단하다고 격려하고 싶다.

이전 11화 어느 운동 마니아의 소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