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가 왜 이렇게 홀쭉해졌지?” 나는 바싹 말라 갈변한 이오난사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이오난사는 내가 한창 신혼집을 꾸밀 때 수염틸란드시아와 함께 들인 공중식물이다. 손바닥보다 작은 깜찍한 크기로 마치 알로에를 축소시킨 듯한 형태다. 뿌리가 땅에 내리지 않아도, 물에 꽂아두지 않아도 오직 잎으로 공중의 수분을 영양 삼아 살아가는 신비로운 녀석. 일주일에 한 번씩 물이 담긴 세숫대야에 푹 담가놓았다가 반나절 정도 지난 뒤 꺼내놓으면 그만이다. 분기별로 분갈이를 해주어야 하는 화분보다 관리가 편하다.
3년 동안 녀석은 조용히 몸을 불렸다. 두 개였던 이오난사는 현재 여섯 개로 불어났다. 집으로 들인 해 가을에 잎이 자주색으로 변하더니 대롱 같은 꽃대가 속에서 쑥 올라왔다. 길쭉한 나팔 모양의 꽃은 크지는 않았지만 강렬한 붉은 색감으로 존재감을 과시했다. 고운 자태를 스마트폰으로 여러 각도에서 찍어두었다. 식물을 키우는 재미 중 하나, 예상치 못하게 꽃을 만날 때다. 왠지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아쉽지만 여느 꽃처럼 그도 오래 가지 못했다. 일주일이나 뽐냈을까. 시들어버린 꽃은 찌그러져 볼품이 없었다. 하지만 이오난사는 부지런히 다음 스텝을 준비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밑동에서 자구가 솟아오른 것이다. 모체와 똑같은 모양의 미니알로에가, 새끼손톱만 크기로 잎 사이에서 솟아 숨어있었다. 한 놈이 아니었다. 밑동 구석구석에 세 개나 숨어있었다. 자식을 셋이나 낳은 것이다.
‘식물 집사’ 커뮤니티에 물어보니 자구를 너무 어릴 때 분리하면 죽을 수도 있으니 모체의 반 정도 크기로 자랐을 때 떼어내면 된다고 했다. 몇 달 동안 나만 아는 느린 속도로 성장하는 자구를 관찰하며 뿌듯해했다. 임산부를 다루는 것처럼 물에 담글 때도 조심스럽게 대했다.
마침내 자구가 제법 자라 핀셋으로 모체에서 떼어냈다. 어린 이오난사가 우리 집에 처음 왔던 제 어미의 크기와 비슷해졌다. 열대지방에 살던 식물이 우연히 대한민국으로 건너와 경기도의 한 아파트에 자리를 잡아 적응하고 번식까지 하다니 놀랍고 또 놀라웠다. 그 후로도 모체는 출산(?)을 두 번 더 했다. 다둥이 엄마였다. 관리해야 할 식물 수가 점점 늘어나 예전보다 물 주기가 번거로워졌지만 기특한 마음이 더 컸다.
그러다 문득 새끼가 아닌 모체를 보니 예전 같지 않음을 느꼈다. 통통하고 균형 잡힌 알로에 형태가 아니라 대파처럼 가늘고 긴 모양이 되었다. 병이 든 것일까. 물을 주고 볕을 보게 해도 회복되지 않았다. 일 년 후, 갈색으로 말라버린 ‘다둥맘 이오난사’는 결국 영영 시들고 말았다.
이오난사가 잦은 출산으로 기력을 다했다는 게 내 결론이다. 5년을 함께한 반려 식물의 죽음은 적잖이 충격이었다. 애초에 녀석이 꽃을 피우고 자구로 번식을 한다는 사실조차 몰랐기 때문에 그의 변신과 성장은 놀람과 기쁨의 연속이었다. 그 사이 정이 들어버린 친구가 떠난 것이다.
40대가 목전인 지금, 내 주변에는 다양한 가족 형태의 친구들이 있다. 혼자 사는 친구도 있고, 결혼을 한 딩크족, 아이가 셋씩 되는 이들도 있다. 새끼를 번식하고 홀쭉해진 이오난사의 모체를 보며 나는 산후 우울증으로 힘들어했던 한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아이를 낳고 나니까 내가 껍데기가 된 기분이 들어.” 자신의 뱃속에서 알맹이가 둘씩이나 빠져나왔더니 자신의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거였다. 잘은 모르지만 홀쭉하고 갈변한 이오난사처럼 친구의 몸도 상했을 것이다. 엄마에게 있던 양분과 에너지를 아기가 흡수한 만큼 엄마는 홀쭉하고 약해진 것이다.
이오난사의 생로병사를 보며 새삼 ‘희생’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자신의 건강을 다음 세대에 양보하는 생명의 순리는 다른 말로 희생 아닐까. 우리가 희생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경외하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라 타인을 위해 자신의 건강을 포기하지 않는데, 자식을 낳아 키우는 일만은 예외다.
그런데 과학적으로 접근하자면 이 일은 도리어 자연스럽다. 모든 생명의 존재 목적은 번식이다. 그렇다면 엄마의 희생은 본능이고 당연한 행동이다. 오히려 본능에 반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 독특한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을 제외한 그 어떤 생물도 자신의 자유로운 삶을 위해 자식을 포기하지 않으니 말이다. 자의 반 타의 반 딩크로 사는 나의 존재 이유를 자문해 봤다. 나는 다음 세대를 위해 나의 건강을 희생하지 않았다. 그랬는데도 그리 건강하지 못하니, 식물이나 동물로 따지면 실패한 삶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의 생활이 나는 꽤 만족스럽다. 이 설명되지 않는 인과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어쩌면 엄마가 아이를 키우는 것처럼, 내가 나를 돌보고 있기 때문 아닐까. 그중 하나가 책을 쓰는 일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오래 해오던 방송 일을 그만두고 ‘내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되어 있었다. 책 한 권을 세상 밖으로 낼 때마다 고통이 따르지만 나는 이 일을 평생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치 출산의 고통을 잊어버리고 둘째 셋째를 낳는 엄마들처럼 기쁨이 크기 때문이다.
그 기쁨은 쓰면 쓸수록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확신에서 온다. 내가 가진 강점과 약점을 알게 되고 나란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아이를 키우면서 진짜 어른이 되었다는 엄마들이 부러웠는데, 나는 다른 방식으로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요즘 들어 앞머리에 새치가 부쩍 늘었다. 뽑아도 뽑아도 자꾸만 솟아난다. 이마와 눈가, 입 주변에는 억지로 표정을 짓지 않아도 주름이 선명하게 보인다. 거울을 볼 때마다 노화를 실감한다. ‘생각하는 나’는 언제나 그대로인 것 같은데 ‘보이는 나’는 계속해서 늙어갔다. 다행인 것은 출간에는 정년이 없다는 것. 나의 늙음은 과일로 치면 익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햇볕을 많이 받고 즐겁게 살아야지. 잘 익은 사람이 되면 더 좋은 글을 낳을 테니까.
이오난사는 자신의 분신을 남겼는데, 내가 사라지고 나면 과연 몇 권의 책이 남을지 궁금하다. 무엇이 됐건 세상에 나라는 사람이 아등바등, 그러나 대체로 행복했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며 살려고 애쓴 흔적을 남기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인생은 재미만으로 완성되지 않으니까. 나는 아마 사는 동안 계속 쓸 것이다.
매일 다양한 만성질환과 싸우고 있지만, 인생에서 나름의 재미와 의미를 찾으며 살아가는 저의 이야기 즐겁게 읽으셨나요? <내 몸 긍정> 연재는 오늘로 마무리합니다. 이 연재물은 내년 상반기에 출간하는 저의 에세이 일부를 맛보기로 보여드린 것이랍니다. 책이 나오면 소식 전하겠습니다. 읽어주신 독자님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행복한 연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