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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버시를 지키며 똥 쌀 권리

한국 화장실과 미국 화장실의 프라이버시

둘째의 초대를 받은 기쁨


  둘째는 몇 달전까지만 해도 응가하러 갈 때 내게 "엄마, 똥 싸러 가자"라고 말했다. 그러면 나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시크하게 "똥 싸러갈때 엄마가 왜 필요한데?"라고 말했다. 그리고 짐짓 성의없는 걸음걸이로 화장실에 동행했다. 하지만 마음 속은 무심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똥을 싸는데 와달라는 초대를 받아 기쁜 마음이었다(초대받은 기분이었다). 변기 앞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황금색 똥이 나오는 것을 지켜봤다. 타인의 똥이 나오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응시한 적이 없었다. 조금도 더럽지 않았고 사랑스러웠다. 

  둘째의 부름이 왜 그렇게 좋았느냐면, '화장실에서 똥 싸는 시간도 이 엄마와 나누어주다니'라는 감격 때문이었다. 원래가 화장실은 혼자 있는 공간이며, 혼자 있어야 편안한 공간이다. 무릇 사생활에 대한 권리를 뜻하는 프라이버시권이란 무엇인가. 프라이버시권을 구체화시킨 미국의 변호사 워렌은 프라이버시권을 '혼자 있을 권리'라고 정의했다. 즉 워렌의 정의와 화장실이라는 공간의 기본 속성을 종합하면, 화장실과 프라이버시는 영혼의 단짝인 셈이다. 그런데 이 공고한 조합을 무장해제시키고 가장 사적인 시간과 공간을 둘째로부터 공유받았으므로, 우리 사이에는 더 이상 나누지 못할 것이 없었다.



바깥이 보이는 미국 화장실


  사실 화장실이라는 공간의 프라이버시 문제에 대해서는 미국 화장실 구조를 경험하며 생각해본 적이 있다. 이십 대 후반에 미국에 한 달 정도 있었던 적이 있었다. 인생을 통틀어 외국에 가장 길게 있었던 때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도대체 왜 그렇게 바보처럼 보냈나 싶지만, 한 달밖에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에, 참으로 착실하고 재미없게 뉴욕에 있는 어학원을 열심히 다녔다. 그런 때문인지 뉴욕의 화려한 거리 이런 것은 기억에 없고,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기억이 난다. 그 중에 하나가 너무 넓었던 어학원 화장실의 용변칸의 문 틈이었다. 화장실 안에서 볼일을 보고 있으면, 화장실 문 틈을 통해 바깥에 누가 지나가는지 전부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조금만 신경쓰면 바깥 사람과 눈인사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시절 종종 한국 화장실의 문 가장자리에 붙어 있던 회색 빛깔 스펀지를 떠올리며, 이 스펀지를 미국에 수출하면 잘 될 것 같은데, 라고 생각했다. 한편 프라이버시에 취약한 뉴욕의 허술한 화장실 구조에는 끝까지 적응하지 못했다. 학원 화장실의 넓은 문틈을 조금이라도 가리기 위해 두루마리 휴지를 문 위에서부터 아래로 늘어뜨려 놓은 휴지를 보면, 뉴욕 어학원에 다니던 다른 이들도 나와 같은 불편함을 느낀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듯하다. 


  한국에 와서는 당연히 뉴욕의 화장실 따위는 바로 까먹었다. 그런데 우연히 미국 화장실의 구조적 기원을 설명한 매우 흥미로운 글을 어딘가에서 읽게 되었다. 넓은 문 틈을 두 가지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었다. 글의 내용을 요약하면 대략 이러하다.

  이 문제에 대한 첫 번째 분석은 미국이란 나라가 탄생한 계기와 관련이 있다. 미국은 이주민들이 침략을 해서 세워진 나라이다. 이런 역사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미국은 총기 소유도 허용하고, 자기 보호를 성역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화장실 안팎에 있는 사람들이 만약에 있을지 모를 위험한 사태를 대비하려면 화장실 구조는 허술해야 한다. 화장실 문틈이 있어야, 볼일을 보는 안에서도 밖에 위험한 일은 없는지 살필 수 있고, 또한 화장실 밖에서도 역시 안에서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지 알 수 있다. 이런 것을 '공격적 프라이버시'라 한다. 

  두 번째 분석은 놀랄 정도로 실용적이다. 틈이 있어야, 밖에서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불필요한 노크를 하지 않으므로, 안의 사람이 오히려 더 편안히 볼일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공격적 프라이버시보단 수비적 프라이버시


  화장실 구조에 담긴 이토록 심오한 뜻을 모르고, 스펀지나 수출하려던 얄팍한 야욕이 부끄러워졌다. 허나 야욕은 야욕이고,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화장실이 사생활 보호에 최적화된 이유는 무엇인가. 요새 새로 지은 백화점 화장실 용변칸은 아래부터 위까지 모두 막혀 있어 너무나 아늑하고 폐쇄적이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대한민국은 이주민의 침략으로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 반만년 유구한 역사로 지켜온 단일민족이므로, 이러한 우리들에게 화장실은 공격적 프라이버시 문제보다 수비적 프라이버시 문제가 더 중요한 것 아닌가. 


  더불어 유치장 화장실의 불충분한 차폐 시설에 대해 아래와 같이 결정한 헌법재판소 판결문이 눈에 띈다. 헌법재판소는 유치장에 수용된 피의자에게 신체의 일부가 노출되는 유치장 내부 화장실 사용을 강제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보았다.  

  "보통의 평범한 성인인 청구인들로서는 내밀한 신체부위가 노출될  있고 역겨운 냄새, 소리 등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용변을 보지 않을  없는 상황에 있었으므로 그때마다 수치심과 당혹감, 굴욕감을 느꼈을 것이고 나아가 생리적 욕구까지도 억제해야만 했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있다. 이 사건 청구인들로 하여금 유치기간동안 위와 같은 구조의 화장실을 사용하도록 강제한 피청구인의 행위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품위를 유지할 수 없도록 하는 것으로서, 수인하기 어려운 정도라고 보여지므로 전체적으로 볼 때 비인도적·굴욕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비록 건강을 침해할 정도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헌법 제10조의 인간의 존엄과 가치로부터 유래하는 인격권을 침해하는 정도에 이르렀다고 판단된다(헌법재판소 2001. 7. 19.자 2000헌마546 전원합의체 결정 [유치장내화장실설치및관리행위위헌확인])."


  그러나저러나, 요즈음 둘째가 화장실에 갈 때 날 부르는 횟수는 점점 줄고 있다. 슬프기도 하지만, 프라이버시를 지키며 똥을 쌀 권리는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지는 권리이니, 기쁘게 둘째가 꼬꼬마에서 어린이로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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