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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원 Jul 29. 2023

아픈 안마 의자: C

C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나는 과학고등학교를 나왔는데, 과학고는 보통 2학년 때 대부분이 조기졸업을 하고 대학교를 간다. 

그런데, 우리들은 공부를 잘 못해서 3학년까지 남게 되었다. (물론 의대를 목표로 한다거나, 더 좋은 대학을 가려고 남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는 그냥 다 떨어져서 남았다.)


보통 과학고를 오는 친구들은, 대학교까지 바라보고 오는 친구들이 있고 과학고 자체만을 보고 오는 친구들이 있다. 


그래서 대학교까지 바라보고 오는 친구들은 이미 과학고의 합격 여부와 관계없이 고등학교 진학도 전에 고등학교 과정을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런데 나나 C 같은 경우에는 과학고를 가는 게 목적인 부류였다. 그렇다 보니, 과학고에 합격하기 위한 준비만 되어 있었지 들어가고 난 다음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고등학교 2년 동안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가며 살아갔다. C의 성적은 기억은 안 나는데, 나 같은 경우에는 고등학교 1학년 중간/기말 모두 전교생 70명 중에 70등을 했다. 뭐 C도 그 근처지 않았을까?


그렇게 우리는 2학년 때 다른 친구들이 대학교를 가는 걸 구경하며, 장렬히 3학년에 남게 되었다.


지금 돌아보면 고작 1년 정도 늦어진 거고, 일반 고등학교로 생각을 하면 늦어진 것 도 아니었는데, 그 당시 70명 중에 거의 60명가량이 대학교를 2학년 때 가고 남아진 10명으로써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패배감이었다.


그 당시 18살의 어린 나이에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라며 엄청 충격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보통 고등학교 친구들을 별명과 함께 저장을 한다. 뭐 '잘 깝치는 A', '줏대 있는 척 B' 이런 식으로.

그 당시 친구들끼리 서로를 놀리며 사용했던 표현들을 이름 앞에 붙여놓곤 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C만은 '정이 많은 C' 이렇게 저장을 해놨었다.


처음 고등학교 때 C는 그렇게 친근하거나 착하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그런데, 같이 생활을 하다 보면, 이 친구의 몸에 밴 본인 도 숨길 수 없는 정이 많은 행동들이 있었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뭔가 투덜대면서도 계속 챙겨주고는 했었다.


C는 가끔 독서실을 돌아다니면서 친구들을 안마를 해주고는 했는데, 엄청 아프게 안마를 해줬다. 그래서 처음에는 얘가 공부를 방해하려고 일부러 괴롭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누가 그렇게 자기 힘써가며 다른 친구들 안마를 해주며 괴롭힐까. 그냥 손이 억셌던 것 같다. 이 아픈 안마가 C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묘사인 것 같다. 그걸 그 당시에 내가 어떻게 인지를 했는지를 모르지만, C는 지금도 '정이 많은 C' 이렇게 저장이 되어있다.

어찌어찌해서 3학년을 열심히 견디며, 우리는 졸업을 하였고 C와 나는 다른 대학교로 갔고 전공도 다르게 갔다.


그렇게 전공이 다르고 나는 컴퓨터과학과를 선택하고 1학년이 끝나고 군대를 갔다. C는 건축인가 토목인가 기억이 안 나는데, 그 둘 중에 하나로 전공을 가고 박사과정까지 스트레이트로 진행을 했다. 군대를 가기 싫었던 것 같다. 


군대에 있는 동안 휴가를 나와서 C의 자취방에서 잤던 적이 있는데, 배정받은 대학원 랩실이 군기가 힘든지 군대랑 다를 바가 없다고 나한테 이야기를 했던 게 기억이 난다.


"그런데 넌 군대를 가본 적이 없잖아?"


군대를 전역하고 내가 스타트업에서 일을 하면서 프로그래밍 실력이 늘었을 때, C의 석사 논문 연구를 같이 진행한 적이 있다. C는 건축 관련된 전공인데 IT를 접목시키는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생각해 보니, 고등학교 때도 컴퓨터 관련된 거는 C가 잘 알았던 것 같아서, 동창들이 뭐 컴퓨터를 살 때나 전자제품을 살 때 C한테 많이 물어봤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같이 연구를 진행했고, 어찌어찌 잘 마무리가 됐던 것 같다.


그리고 C는 박사를 마치고 포닥을 하러 미국으로 떠났다.

그 당시 나는 노르웨이로 석사 유학을 가서 늦깎이 석사생이 되었을 때다.


우리는 그렇게 따로 보지는 않았지만, 고등학교 친구들이야 워낙 기숙사와 같은 고립된 공간에서 지내왔어서, 연락을 자주 안 해도 언제 봐도 어제 본 것 같고 그랬다.


그러다 어느 날 C가 서울의 유명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전히 같은 과 교수인 것 같았는데, 마침 학교에서도 프로그래밍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던 때여서 건축학과지만 프로그래밍 관련 연구 실적이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고 한다. 


거의 고등학교 동창 중에 손에 꼽히게 빠르게 교수가 된 것 같다. 


항상 C가 내가 컴퓨터과를 선택한 걸 보고,

"3학년이 과 잘 선택해서 팔자 폈네"라는 농담을 하고는 했었는데, 자기한테 해야 할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이번에 잠깐 휴가를 내서 한국에 갔는데, C가 마치 할머니처럼 계속 나한테 뭔가를 챙겨주지 못해서 아쉬워했다. 엄마나 할머니가 자기가 챙겨주지 못해 서운하다고 표현을 하는데, C도 서운하다는 표현을 많이 썼다.


이렇게 정이 많았던 친구가 왜 이리 고등학교 때는 투덜댔을까를 생각해 보면, 중학교 때 그렇게 공부를 잘하고, 고등학교 때 그 나이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패배감이 점점 자기를 치사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본성이 어딜 가랴, 그 투덜대는 와중에도 몸은 사람들을 챙겨주고 있는걸..


C가 교수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정이 많았던 아이가 보상을 받았구나...

최근에 만나서 C에게 부럽다는 이야기를 했다. 같이 고등학교 3학년 때, 패배감 속에서 살아야 했던 심정을 알기에 이렇게 멋지게 자리 잡은 모습이 너무 멋있고 부러웠다.

공항 가기 2시간 전까지 나에게 짜장면을 사주며, 끝까지 배웅을 해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C에게 채용 됐을 때 얼마나 부모님이 좋아하셨을지에 대해 물어봤다.


둘 다 고등학교 때 하도 탈락의 고배를 마셔서, 서로의 부모님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알고 있었다.


"미국에서 포닥을 하다가, 한국에 돌아간다니까 부모님이 걱정 먼저 하시더라, 적응 못하고 힘들어서 돌아오는 줄 알고."


"면접 봤다는 얘기를 안 한 거야?"


"야 우리 엄마 고등학교 때 내가 대학을 하도 떨어져서, 트라우마 있어서 그런 얘기 못해. 그래서 이번에는 합격한 다음에 말했어."


"너무 좋으셨겠다. 진짜 잘했다."



3학년을 남았던 우리끼리는 "3학년"이라는 표현을 자학의 의미로 자주 사용하고는 했다. 그렇게 서로를 3학년이라고 놀리면서 지냈었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C는 멋지게 3학년을 졸업했지만, 나는 뭔가 아직도 인생의 3학년인 느낌이 든다.


나도 빨리 졸업할게 C.


커버 사진: Photo by naipo.de on Unsplash

본문 사진: Generated by Mid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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