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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이루는 작은 인연들

나를 이루는 인연들에 관하여 5

by 양주안

해변은 낮보다 밤에 더 싱그럽다. 빛이 사라지면 비로소 들리는 소리들이 있다. 먼바다에서 파도가 빚어지는 소리, 바람이 모래를 스치며 지나는 소리. 낮에는 이것들보다 중요한 풍경이 많다. 에메랄드빛으로 넘실대는 바다, 한가한 사람들, 고기 굽는 냄새, 음악에 맞춰 추는 춤, 먹이를 찾아 날아드는 펠리컨. 카리브해의 낮은 밤보다 화려하다. 중요한 것이 많아 바다가 내는 소리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밤은 낮에 듣지 못한 소리를 위해 이루어진 시간이다.

멕시코 동부 해안도시 푸에르토 모렐로스에서 자주 밤 해변을 산책했다. 친구들은 컴컴한 해변을 걷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색을 잃어버린 카리브해는 다른 바다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어둠이 내려앉으면 이곳이 주문진인지 푸에르토 모렐로스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밤의 해변에서는 늘 혼자였다.

산책을 마치면 택시를 타고 늪지대 건너 술집으로 향했다. 이 도시에는 크게 두 개의 구역이 있다. 해변 근처 관광객이 많은 구역과 커다란 늪을 지나서 나오는 현지인 거주지역이다. 약속을 따로 하지 않아도 매일 같은 곳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술집 미첼라다스 데 세마포로. 커다란 늪 하나만 지나면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 같다. 술과 음식은 반값이다.

손님은 관광객을 상대하며 살아가는 노동자들이 전부다. 대부분 관광호텔이나 식당에서 일한다. 낮 동안 해변에서 몇 번이고 마주쳤을 얼굴들일 테지만 기억나는 사람은 없다. 점심에 먹은 세비체를 가져다준 웨이터가 있을지도 모른다. 푸에르토 모렐로스는 무척 작은 도시이므로 벌어질만한 일이다. 아름다운 카리브해를 보고 있는 동안에는 그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뿐이다.

록밴드 공연이 한창이었다. 멕시코 밴드 엘 트리의 <A.D.O>의 후렴구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지옥행 버스 터미널”이라는 가사가 나오면 모두가 목소리를 높였다. 비관적인 노랫말에 열광하는 모습이 그다지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밤은 무척 짧고 낮이 오면 늪을 지나 일하러 가야 한다. 때때로 비관적 미래를 더욱더 비관적으로 바라보며 힘을 얻기도 한다.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모여 있다면 가능한 일이다. 혼자서 하는 비관은 위험하지만 함께하는 비관은 희극이 되기도 한다. 술집에는 노래와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미첼라다스 데 세마포로의 사람들은 관광지에서 그 누구보다 진짜인 삶을 살아가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푸에르토 모렐로스는 더 중요한 것이 많은 곳이므로. 밤이 되어야만 진짜 이 도시를 이루는 이들을 수 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다시 목청껏 지옥행 버스 터미널을 외친다.

누군가는 괴상한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모든 언어의 기원은 외마디 외침이 아닐까. 늑대의 하울링이나 호랑이의 울음에는 문자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단순한 목소리로 서로를 부른다. 고도화된 언어는 그다음에 이루어진 약속이다. 사람이 낼 수 있는 가장 순수하고 생생한 언어 역시 단순한 목소리일 것이다. 아플 때 내지르는 비명이나, 힘들 때 허공에 뱉어내는 고함, 환호의 휘파람, 넘실거리는 웃음소리.

밤은 낮에 들을 수 없는 생생한 소리의 시간이다. 무엇보다 솔직하다. 밤 해변에서만 바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늪을 건너야만 이 도시의 주인이 지르는 고함이 들린다. 포장하지 않은 진실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검은 바다와 비관으로 가득 찬 술집이 전부다.

중요한 진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에메랄드빛 바다를 보며 싱싱한 세비체 한 그릇을 먹거나, 맥주 한 병 들고 그네에 앉아 호화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을 때 알 수 없었던 것들이 있다. 바다는 끊임없이 파도를 지어 해변으로 보낸다는 것. 바람이 해변의 모양을 결정한다는 것. 내일 먹을 세비체는 이들 중 한 사람의 손으로 만든다는 것. 맥주를 잔에 가득 담은 웨이터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것. 밤은 진정한 소리를 위해 이루어진 시간이다. 그렇기에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들을 잠들게 한다.

밤의 해변에서 나는 나를 이루고 있는 중요하지만 눈에 띄지 않는 것들을 어루만진다. 숨을 크게 쉬면 가슴이 부풀고 어깨가 쓱 올랐다 내려온다. 삶에 의미를 찾아가려는 중요한 노력들에 가려져 알 수 없었던 근육 하나하나의 움직임을 세세하게 감각한다. 여기에 나는 살아 있고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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