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루는 인연들에 관하여 4
푸에르토 모렐로스의 파라다이스 비치 클럽. 이곳의 해변은 비교적 한적하고 평화롭다. 젊은 여행자보다 은퇴 이후 긴 휴가를 즐기는 미국인이 더 많다. 해안을 따라 집들이 촘촘하게 늘어서 있는데, 대부분 미국인의 여름 별장 아니면, 비싼 호텔이었다. 숙소는 해변과 멀어질수록 저렴하다.
느슨한 삶에도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오후 12시 40분에 룸메이트들과 거실에 모여 파라다이스 비치 클럽으로 출발하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계획이 틀어져 5분이라도 늦게 바에 도착하면, 큰 손해를 보는 사람들처럼 오후 1시에 딱 맞춰 클럽에 도착했다. 하루에 단 두 시간 맥주 한 병 가격에 두 병을 주는 이벤트를 여는데, 그 시간을 해피타임이라 불렀다.
대부분 젊은 배낭여행자였다. 물가가 비싼 해안가 근처에서 보이지 않던 젊은 여행자들은 해피타임에만 바다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해변가 자리에는 돈 많은 사람들이 앉아 바다를 즐기고 있었으므로 좋은 자리에서 술을 즐길 수는 없었다. 젊은 여행자들은 좁은 테라스에 꾸역꾸역 모여 술을 마셨다. 해변에서 테라스로 올라오는 계단은 서로 다른 두 세계를 구분 짓는 경계선 역할을 했다.
클럽 직원들도 해피타임에 더 활기찬 얼굴을 띄었다. 테라스에서 담배 태우는 사 람이 많아졌고, 직원들도 하나둘 담배를 입에 물기 시작했다. 사방이 뚫린 테라스에 담배 연기가 들어찼다. 해변 사람들은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테라스로 올라오지 않았다. 두 개의 세계는 이런 풍경이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구분 지어 저마다의 오후를 즐겼다.
경계가 명확하다는 게 단절은 아니었다. 해변 사람들은 테라스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젊은이들을 보며 자신의 과거를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를 돌려 보는 기분이었을까. 아무튼, 제법 많은 시선이 바다가 아닌 테라스로 향했다. 철없는 젊은이들은 그런 시선에 보란 듯이 더 시끄럽고 요란하게 술을 마시고, 담배를 태웠다. 그런 방식으로 해변과 테라스는 교감했다.
함께 술을 마시던 친구 M은(그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의 이름을 물은 기억조차 없다) 강한 어조로 해변의 사람들을 비판했다. M은 캐나다인으로 푸에르토 모렐로스에 놀러 왔다가, 3년째 살고 있었다. 그는 푸에르토 모렐로스의 모든 문제가 해변에 있는 사람들 때문에 벌어졌다고 했다. 다음과 같은 이유로 해변 사람들을 싫어한다고 했다.
1. 해변 부동산을 모두 장악해 버렸다. 누가 그들에게 바다를 모두 가질 권리를 주었는가. 몇몇 해변은 사유지로 다른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두었다. 현지 직원들을 마치 하인 부리듯 대한다.
2. 팁을 넉넉히 주지만, 그만큼 생색도 많이 낸다.
3. 이 모든 일이 푸에르토 모렐로스의 경제를 살리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자신들에게 멕시코 정부가 고마워해야 한다고 말한다.
해변의 모든 사람이 그럴 거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3년간 이곳에 머문 M의 말을 피해망상이라고 함부로 말할 수도 없었다. 결정적으로 M과 나는 푸에르토 모렐로스를 생각하는 깊이가 달랐다. 길어야 몇 주 정도 이곳에 머물 생각이었다. 비판보다는 해피타임을 즐기고 싶었다. 애정의 깊이가 깊을수록 비판에는 날이 선다. M의 말들은 잘 갈린 칼처럼 명쾌하게 썩은 부분을 도려내려 했다.
M의 주장에 대해 다른 의견도 있었다. 역시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옆자리 여행자였다. 그는 현실적으로 해변의 사람들이 푸에르토 모렐로스를 먹여 살리는 것이 맞지 않냐고 반박했다. 우리가 해피타임을 즐길 수 있는 것도, 그들이 돈을 아끼지 않고 쓰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는 말을 끊지 않고 M을 몰아붙였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미래나 희망보다 몇 푼 돈이 더 중요하기도 합니다. 인권이니, 평등이니, 이런 고상한 것들보다 말이죠. 돈이 필요해요, 돈이.” M은 말을 잃었고, 이내 자리를 떠났다.
파라다이스 비치 클럽에는 일당 5달러의 삶과 세비체 한 그릇에 5달러면 거의 공짜라며 고민 없이 시켜 먹는 삶이 함께 있었다. 눈으로 보기에는 모두 한데 섞여 있었으나, 실은 아주 명료한 경계선이 그어져 있었다. 누구의 주장이 더 옳은가. 두 세계 중 어느 곳이 천국이고, 어느 곳이 지옥인가.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럼에도 파라다이스 비치 클럽을 찾아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기왕이면 돈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이 찾아오는 것이 좋겠다. 일당 5달러가 싸네 비싸네 할 것도 없이 그 돈은 직원들의 생명이다. 생색을 내니 마니 해도 팁은 많이 줄수록 좋다. 테라스에 앉은 우리에게 예의는 있지만 팁은 주지 않는 손님이 필요한가 아니면, 무례하지만 팁은 두둑하게 주는 손님이 필요한가. 무엇이 너 낫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무엇이든 타인의 삶이 망가진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예의가 없으면 존엄이 무너지고, 돈이 없으면 삶이 무너진다.
파라다이스 비치 클럽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차려져 있다. 오직 연약한 생명들이 그 해변을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