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가까워질 때 벌어지는 일들
낯선 사람을 몇몇 만나면서 몸이 보내는 예민한 신호에 귀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친절한 말투와 상냥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사람 앞에서 몸이 굳기도 하고, 반대로 말을 툭툭 던지는 사람 앞에서 몸이 녹아내리기도 한다. 몸이 보내는 신호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하는 건 아니다. 함께 있을 때 편안한 사람을 찾아간다는 게 좀 더 어울린다. 물론 이마저도 정확한 건 아니다. 일종의 미신이었으나 낯선 장소에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감각이니 믿어 보는 수밖에 없다.
알레시아의 집 거실 소파에 슬라임처럼 퍼져 누워버렸다. 그와 만난 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긴장이 순식간이 사라졌다. 언젠가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못 믿을게 사람이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믿을 만한 사람 한두 명만 있으면 성공한 삶이라고도 했다. 아버지의 논리에 따르면 믿을 만한 사람이란 인생의 막바지에 서서 지나간 인연을 조망할 만큼 넓은 시야가 생겼을 때나 알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여러모로 악재가 겹친 상황을 헤쳐 나가는 중이던 친한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삶은 행복하다, 행복한 수밖에 없다, 그 수밖에 없다. 나쁜 걸 생각하면 한없이 침잠하고 말 거라며 건넨 말이었다. 불행한 일들이 몸을 덮쳐 올 때 나의 친구는 행복이라는 단어로 수를 두었다. 알레시아의 소파 위에서 내가 둘 수 있는 수도 하나뿐이다. 알레시아를 믿어 보는 수밖에 없다.
적당한 믿음을 주고받는 일이야 말로 짧은 만남의 장점이다. 길어야 일주일 정도 가는 가벼운 신뢰는 복잡한 내면을 공유하지 않아도 가능하다. 당장 서로에게 줄 수 있는 만큼의 진실만 풀어놓으면 그만이다. 짧고 가벼운 믿음의 경험이 쌓이면 사람에게서 희망을 보는 눈을 얻는다. 그건 새로운 사람을 마음에 들일 때 필요한 용기가 된다.
알레시아와 나는 적당한 믿음의 한계를 알고 있다. 운명적 사건이 없는 한 서로에게 평생의 울타리가 되어주지는 못할 거다. 길고 긴 시간을 함께 헤쳐 나가며 서로에게 믿을 만한 사람이 된다는 건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애정과 증오 따위의 모순된 단어들이 두 사람 사이에 부유한다는 뜻이다. 진정한 믿음을 쌓기 위해서는 수많은 결별을 겪어야 한다. 나의 절망을 견디지 못해 떠나는 사람, 너의 슬픔에 동참할 수 없어 떠나야 했던 사람. 그 모든 절망과 슬픔을 겪어낸 뒤에야 진정으로 아버지가 말해준 한두 명의 믿을 만한 사람이 남지 않을까. 진정한 믿음은 실패를 쌓아 얻는 것이므로 절망적 미래를 염두에 두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건 결별을 견뎌야 할 때 필요한 끈기가 된다.
알레시아와 나는 한계가 뚜렷한 시한부 믿음을 주고받는다. 가볍고 짧지만 당장에는 나를 길바닥에서 구원해 준 위대한 약속이다. 모든 사람과 농도 짙은 친구가 된다는 건 허무맹랑한 말이다. 때때로 느슨한 친구가 결정적인 도움을 주기도 한다. 나는 이탈리아에 있고 알레시아는 여기서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주방에서 인스턴트 피자를 데우며 흥얼거리는 좁은 어깨가 제법 든든하다. 깡마른 그의 등판이 내게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안전한 기둥처럼 보인다. 며칠 동안 의지해야 하는 유일한 사람의 뒷모습은 정말이지 작고 말랐다.
주방에서 피자 익는 냄새가 났다. 이 집 냉장고에는 인스턴트 피자가 몇 박스 쌓여 있다. 이탈리아인들이 음식에 엄청난 자부심이 있다고 말하지만 일상에서는 냉동 피자만 한 게 없다.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리면 그만이다. 데운 피자 판판이 내 몫이다.
한 조각 크게 베어 물었다. 미슐랭 부럽지 않다. 그러고 보면 풍미가 음식의 전부는 아니다. 자기 몫을 나누어주는 마음과 뜨거우니 조심히 먹으라는 다정한 말에서도 맛과 향이 난다. 세상에서 제일 못 믿을 게 사람이라지만 결정적인 순간 믿고 싶어지는 것도 사람이다.
우리는 피자를 다 먹기도 전에 약속했다. 내일은 다른 브랜드 인스턴트 피자를 먹자. 누군가와 다음 식사를 기약한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먼 미래에까지 우리가 함께할 수 없지만 당장 소박한 믿음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지킨다. 내일 저녁은 혼자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