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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편이 된다는 건

우리가 가까워질 때 벌어지는 일들

by 양주안

담요를 둘둘 말아 머리에 베고 누웠다. 상에 남아 있는 쿠키 두어 개 집어 오물오물 씹었다. 인생이 이렇게 편하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매번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건 여행이나 일상이나 다를 바 없다. 이대로 몇 년쯤 흘러버려도 괜찮겠다.

소파 반대편에서 통화하던 알레시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나서야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는 내게 미안하다며 통화가 길어진 이유에 관해 설명했다. 친구가 방금 애인과 헤어졌어. 이야기가 시작하자 한가한 시간이 끝났다. 하여간 삶은 평온한 시간을 오래 누리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몸을 일으켜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의 친구 A와 그 녀석은 몇 달 뒤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다. 그 녀석이 다른 여자와 몸을 포개고 앉아 있는 장면을 들키기 전까지는 그랬다. 실은 오래 전 알레시아는 그 녀석이 다른 여자(그러니까 이번에 들킨 것 말고 다른 사건)와 다정히 걷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다. 우리는 그걸 첫 번째 사건이라고 불렀다.

그때 알레시아는 A를 몇 시간이고 설득했다. 제발 헤어지라고 부탁도 해보고 그놈과 계속 만난다면 나와 연락할 생각도 말라고 협박도 했다. 알레시아의 성화에 못 이겨 A는 헤어졌으나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몇 달 뒤 다시 그 녀석과 만나기로 했다며 찾아온 A 앞에서 알레시아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단지 어깨를 감싸 안고 말했다. 나보다 네가 더 고민이 많았을 테니까.

나는 첫 번째 사건의 종결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알레시아에게 왜 마지막까지 친구를 설득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알레시아는 A를 믿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대답했다. 나는 결국 헤어지게 되지 않았느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알레시아는 고개를 들고 내 쪽을 쳐다봤다.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는 뒤뚱거리며 뛰어다니다 넘어진 아이를 보았을 때 보이는 부모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거 저러다 넘어지지. 입으로 되뇌다가 막상 일이 벌어지고 나서 드러나는 허무한 얼굴 말이다. 허탈함 사이로 걱정과 분노가 반씩 섞인 눈빛이 새어 나왔다. 그 순간 내가 우리 사이에 그어진 경계를 경솔하게 뛰어 넘었다는 걸 눈치 챘다.

먼저 물었어야 하는 건 알레시아의 과오가 아니라, A와 얼마나 친밀한 사이인가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나누고 있는 슬픔의 무게를 가늠했어야 했다. 그걸 미리 알았더라면 함부로 둘 사이에 끼어 들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거다.

나는 바닥을 보고 숨을 크게 쉬고는 물었다. 네게 그는 어떤 사람이야? 그러자 알레시아는 고개를 숙인 채 흐느꼈다. 나는 가만히 울음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가끔 대답 없이도 스스로 완성되는 질문이 있다. 어떤 근사한 문장보다도 완벽하다. 떨리는 어깨와 떨어뜨린 눈물 같은 것들이다. 두 사람 사이 어떤 서사가 있는지 듣지 못했다. 더는 묻지도 않았다.

한참 뒤 정신을 차린 알레시아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연신 주물렀다. A와 통화하며 머리가 지끈 거렸던 모양이다. 누군가를 지지한다는 건 아무래도 골치 아픈 일이다.

어디라도 가야겠어. 머리도 식힐 겸 야간 드라이브를 하기로 했다. 알레시아는 내가 만토바에 가려다 이곳에 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왕복 이 차선 구불거리는 산길 처럼 난 도로에는 가로등이 거의 없다. 자동차 빛이 비추는 부분에만 길이며 산이 보인다. 우리는 좁고 어두운 도로를 시속 백 킬로미터로 달렸다.

라디오에서 「라밤바」가 흘러 나왔다. 알레시아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기어를 바꿨다. “그러고 보면 슬픈 일이 아니야! 결국 그 자식과 헤어졌잖아! 좋은 일이야. 그치?” 그러고는 라디오 볼륨을 더 높였다. 나는 조수석 창문 위에 달린 손잡이를 꽉 잡았다.

늦은 밤이라 술집 말고는 불이 들어와 있지 않았다. 어두운 소르델로 광장에는 두 개의 커다란 성이 나란하게 마주보고 있다. 알레시아는 두 성에는 각각 다른 가문이 살았고 사이가 무척 나빴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는 셰익스피어가 베로나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썼다고 알려져 있지만, 만토바의 소르델로에서 광장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이에 관해 확인 된 건 없지만 알레시아는 확신에 차 있었다. 우리는 다시 걸었다.


“여기에 맥도날드가 들어온다고 했을 때 만토바 사람들 난리도 아니었지.”

“맥도날드가 들어오는 게 나쁜 일인가?”

“당연히 안 되지! 아름다운 광장에 노란 맥도날드 간판이 서 있는 끔찍한 광경을 상상해 봐. 으으 생각만 해도......”

“아! 말도 안 되지 그럼!”

알레시아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가 진심으로 화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때로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감정이 먼저 동요하곤 한다. 어느새 내 말투에도 힘이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맥도날드 반대 플랫카드를 들고 시위대 앞으로 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탈리아 사람 다 됐네!”

“난 네 편이 된 거 뿐이야!”


사람은 이런 방식으로 동지가 되고 적이 된다. 내가 한껏 격앙된 말투로 말을 이어가자 알레시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모르는 사이 그에게 무언가 배우고 있었던 듯하다. 적어도 편드는 법은 확실히 여기서 터득한 게 맞다. 소르델로 광장을 마주보고 서 있는 두 개의 성도 다르지 않았을 테다. 진짜로 싸우는 이는 몇 명 안 되고 각자의 편에 서준 이가 더 많았겠지. 애정은 동지와 적을 동시에 만드는가 보다.

“그나저나 그 녀석 말이야, 아주 몹쓸 인간이야.”

문득 떠오른 말이었지만 나름의 선언 같은 것이었다. 나는 오늘 완전히 네 편이 되었다! 차마 글로 옮겨 담을 수 없는 지저분한 욕도 곁들였다. 알지 못하는 이에게 이처럼 진심을 담아 저주를 퍼부은 기억이 없다. 이상하게도 내 속이 다 후련했다. 그러자 알레시아도 여름 한 철 쏟아진 비를 방류하는 댐처럼 나쁜 말들을 쏟아냈다.

“당장 가서 따귀라고 한 대 날리고 싶다니까.”

썩 지저분한 낱말들을 입 밖에 내고 나서 잠시 눈을 맞췄다. 알레시아는 웃고 있었다. 아마 나도 웃고 있었던 듯하다. 그가 내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난 그렇다 치자, 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네 편이니까!”


누구의 편이 된다는 건 편협한 인간이 된다는 뜻일까? 그 녀석에게 반론의 기회란 없다. 맥도날드의 좋은 면에 관해 들어볼 볼 필요도 없으며 이곳에 오기 전에 빅맥을 먹으며 ‘그래 이 맛이야!’라고 했던 좋은 기억을 구태여 회상할 이유도 없다. 모든 일에 정의의 여신처럼 눈을 가린 채 저울을 들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누군가의 편이 된다는 건 기꺼이 졸렬한 인간이 되는 거다. 삶에 미워하는 무언가를 하나 새기는 일이다. 희한하게도 어떤 미움은 애정의 통과의례다. 여기서 나는 알레시아 편이다.

무엇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는지, 언제부터 무턱대고 한쪽 편을 들고 서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더 헤아리기 어려운 건 그 녀석을 향한 나의 미움이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는 말은 이런 뜻이었던 걸까. 인생에 믿을 만한 사람 하나 남으면 성공이라는 말 속에는 얼마나 무수한 불신이 숨어 있는 걸까. 여기까지 오는 길에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가 계산할 겨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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