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와 길잃음 가운데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안식을 취했다. 태양이 아침놀을 거쳐 마침내 하늘 가운데로 떠오를 때까지. 그는 눈을 뜬다. 그리곤 갑자기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지른다. 새로운 진리가 떠오른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에게는 길동무가 필요하다.”
그는 하산한 이래로 지금껏 몰락의 길을 걸어왔다. 그는 마치 태양이 저편으로 내려가 하계를 비추어주듯이 군중들에게 자신의 지혜를 나누어주고자 했다. 하지만 그 길은 험난했다. 그는 예수처럼 환영받지 못했고 죽음의 길을 거쳐야만 했다. 그러나 예수가 끝내 군중을 향했던 것과 달리, 차라투스트라는 길동무를 찾는다. 길동무는 창조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선과 악을 경멸하고 파괴한다. 그리고 새로운 가치를 새로운 서판에 써넣는다. 차라투스트라는 바로 이런 자를 찾는 것이다. 반면 인간들은 얼마나 모순적인가. 그들은 깨어있을 때면 악행을 일삼지만, 잠들어있을 땐 또 얼마나 순수한가. 그런 그들에게 차라투스트라의 지혜는 그저 허공으로 흩어질 뿐이다. 그는 이 때문에 번뇌에 휩싸였고 길을 잃어버리기도 했던 것이다.
새로운 태양이 그의 머리 위로 떠올랐을 때, 차라투스트라는 군중과 함께여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는 길동무를 찾고 그들에게 무지개를, 초인에 이르는 계단들 모두를 보여주려 한다.
그런데 이것이 그가 군중과 완전히 멀어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수가 자신의 양들 뿐만 아니라, 다른 우리의 양들까지도 이끌려고 했듯이, 차라투스트라도 가축들을 최대한 꾀어내려 하고 있다. 다만 그는 예수와 대척점에 서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기껏 가축이나 돌보는 양치기라든지 개가 되어서는 안된다!” …
그는 심지어 목자들로 하여금 강도라 불리길 바란다. 예수가 그들을 인도하려는 것과 달리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을 빼앗으려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양치기들로부터 강도라 불리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데 그는 왜 빼앗으려 하는가? 무엇보다 빼앗는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대목에서 우리는 차라투스트라가 예수와 닮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시장 한복판에서 그는 마치 예수처럼 말했다. 예수가 그 많은 사람들 중 그 누구도 하느님의 은혜를 받지 못했음을 꾸짖었듯이, 차라투스트라는 시장 속 사람들을 보며 말종인간이라 꾸짖었다. 예수가 그로인해 사람들에게 죽임당할 뻔 했듯이, 차라투스트라도 그일로 인해 죽음의 길을 거쳐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예수와 달리 신이 죽었다고 말하는 자다. 그럼에도 그는 삶에 고통스러워하는 광대를 구원했다. 오히려 착하고 의로운 자들과 올바른 믿음을 가진 신자들보다 더 삶에 가까운 자인 것이다. 또 그는 예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길을 걸으려 한다. 예수는 선한 목자로서 인간들을 이끌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자신과 함께 창조하는 자들을 기다린다. 그는 심지어 길동무들에 앞서 자신의 길을 간다. 차라투스트라가 태양을 보며 자신도 그와 같이 몰락하려 했던 것처럼, 그의 길동무들도 차라투스트라를 보며 몰락하길 바란다. 이처럼 차라투스트라는 예수의 유산들, 그가 창조했던 가치들과 서판들을 빼앗고 부수며 새로 쓰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가 창조했던 것들은 이미 군중의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군중과 가축 떼는 내게 화를 내리라”…
차라투스트라 앞에, 모든 만물은 창조하는 자들로부터의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 모든 것은 무르익었다. 왜냐하면 창조하는 자들에 의해 비로소 새로이 창조되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함께 수확할 자들을, 백 개의 낫을 기다린다. 그는 길동무와 함께 양치기의 가축들을 빼앗고자 한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과 함께 축제를 벌이고자 한다.
그 축제 가운데, 기존의 모든 가치들은 빼앗기고 전복된다. 그것들은 또한 새롭게 태어난다. 그 축제는— 태양이 가장 높이 떠올랐을 때, 정오에 벌어질 일이다. 가장 강렬한 빛의 시간. 그러므로 모든 거짓된 그림자가 사라질 시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