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217(D+42)_스리랑카/캔디
민족의 명절 설이다. 어제, 오늘 가족은 물론 몇몇 지인들과 인사를 나눴다. 사실 그 인사 덕에 설날인 것을 인지했지 그렇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니 타국에서 맞는 설은 처음인 것 같다. 동생이 차례 모시는 사진을 보내왔는데 늘 보던 그림에서 나만 빠진 느낌이었다. 한국에 있었으면 차례가 끝난 후 세배를 하고, 가족들과 둘러앉아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은 뒤 부른 배를 두드리며 낮잠이나 퍼지게 잤을 텐데 이곳의 상황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
오늘은 유네스코가 신성도시로 지정한 캔디의 곳곳을 둘러볼 계획이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캔디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불치사. 부처님의 치아를 모신 곳이다. 불자가 아닌 나로서는 불치사에 보관 중인 유물이 얼마나 대단한지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작년 4월, 이 유물을 공개하겠다는 소식에 불자 45만 명이 몰려 10km 줄을 늘어섰다 하니 엄청난 불가의 보물임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오늘은 불치사에 모셔진 치아를 보여주겠다는 것도 아닌데, 불치사 앞은 아침부터 인산인해를 이뤘다. 우리 역시 티켓을 구매하고 어김없이 신발과 양말은 모두 맡긴 후 입장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뜨거운 바닥을 맨발로 밟고 다니는 일도 만만치 않았지만 비 내리는 날 맨발로 활보하는 것도 유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게다가 사찰이나 박물관 바닥은 젖은 발로 들어온 수많은 사람들 덕에 이미 엉망이었고 그걸 다시 밟아야 하는 입장은 상당히 곤란했다. 그래도 최대한 경건한 마음으로 유서 깊은 문화 유적을 둘러봤다. 비를 최대한 피한다고 피하며 사찰 내를 돌아다녔지만 관람이 모두 끝날 무렵에는 옷이 적잖이 젖어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내리는 비의 양은 더 늘어났고 나와 아들은 비가 잦아들 때까지 꼼짝없이 처마 밑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처마 밑에서 함께 비를 피하던 사람들은 어디서 구한 우산인지 하나, 둘 자리를 떴고 결국에는 우리 둘만 남게 되었다. 그야말로 처량한 새해의 시작이었다.
비는 한 시간을 뿌린 후 잠시 주춤했다. 움직일 수 있을 정도가 되자 우리는 부리나케 숙소로 돌아왔지만 하루 종일 날씨는 찌뿌둥했다. 언제 비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하늘을 하고 있으니 섣불리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아들은 다시 나가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고 싶었는지 씻으라 씻으라 해도 잘 안 씻던 녀석이 들어오자마자 샤워를 해버렸다. 나는 혼자서라도 저녁에 나가 볼까 샤워를 뒤로 미뤘는데 날은 결국 좋아지지 않았고 저녁 무렵에 나 역시 외출을 포기했다.
저녁은 어제 마트에서 사다 놓은 라면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식기는 호텔에서 빌리기로 했고 식기만 빌리기가 미안해 계란 볶음밥을 하나 주문했다. 라면 조리법은 뽀글이.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방법이지만 혹시 몰라 설명을 하면 봉지라면의 주둥이를 정교하게 뜯어 수프를 붓고 끓는 물을 부어 컵라면처럼 먹는 방식이다.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주둥이는 성심성의껏 잘 뜯어야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냄비에 끓일 때처럼 시원하게 뜯어 젖혔다가는 물을 부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수프를 넣기 전에는 봉지에 구멍이 없는지 살짝 물을 넣어 확인하는 것도 필요하다. 수프를 넣은 상태에서 물을 콸콸 부어 넣은 후 봉지의 구멍이 발견되면 돌이킬 수 없다. 물을 모두 부은 후에는 라면 주둥이를 잘 잡고 있어야 하는데 주둥이를 뚫고 올라오려는 열기가 만만치 않다. 그래서 보통은 나무젓가락을 반만 뜯어 붙잡아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는 나무젓가락이 없으니 빌린 포크의 살과 살 사이에 고이 접은 라면 봉지 주둥이를 끼워 넣었다.
우리가 먹은 라면은 뽀글이 중에도 난도가 높은 비빔 라면이었다. 물을 버리는 과정이 하나 추가 되는데 역시 성가신 과정 중 하나다. 그럼에도 우리의 뽀글이는 잘 완성됐고 나는 아들에게 꼭 필요한 삶의 지혜를 전수했다는 생각에 으쓱해졌다. 우리는 비빔라면을 적당히 먹은 후, 포크를 빌리기 위해 주문한 볶음밥을 라면 봉지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소스에 잘 버무려 마무리했다. 아들은 이 과정에서 볶음밥을 넣은 라면 봉지를 모 프랜차이즈 햄버거 브랜드의 양념감자처럼 흔들어댔고 그 결과에 뿌듯해했다. 청출어람이라면 이런 모습을 두고 하는 표현일까.
설날이지만 좋은 음식을 먹이지 못했다. 고기나 잡채, 각종 전은 물론이거니와 설날의 대표 음식 떡국도 우리에게는 모두 먼 나라 이야기였다. 다니다 보면 재우지 못하고 먹이지 못할 때가 가장 마음에 걸린다. 특히 이런 특별한 날은 더 그렇다. 떡국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정성 들여 만들어준 뽀글이를 아이가 좋아했으니 그래도 다행이다. 내년 설에는 온 가족이 함께 떡국을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때는 오늘 먹었던 뽀글이 이야기가 밥상머리에서 대활약하지 않을까. 누군가는 떡국 대신 비빔 라면 뽀글이와 볶음밥을 달라고 외칠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떡국이 아닌 뽀글이를 먹어도 한 살 더 먹는 건 변함없겠지? 나야 이제 나이 먹는 게 반가울 나이가 아니지만 아들은 하루라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