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관과 비관 사이
제로웨이스트, 비건, 환경, 무해함.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가끔 이런 질문을 듣습니다.
이런 거 한다고, 세상이 바뀔까요?
첫째, 세상을 한 번에 바꾸어 놓으려는 비장함까진 사실 전 없습니다. 만약 대나무 칫솔을 쓰거나 주 1회 채식하기로 세상이 바뀌리라 기대했다면, 우리 솔직해집시다. 그걸로 세상은 못 바꿉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그냥 이런 사람들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일 죽을 것을 알면서도, 오늘 자이브와 차차차를 배워보고 싶다며 아르헨티나 스포츠 댄스 센터에 등록하러 가는 사람들요. 지구온난화의 끝이 점점 절망뿐이란 걸 알지만 칠흑 같은 비관을 깨뜨리는 힘없는 작은 촛불을 따라 흐릿한 시선을 옮기며 발걸음을 떼보는, 그런 사람이요.
둘째, 당신이 내일 죽으니 오늘 아무것도 하지 않을 타입은 아닌 덕분에, 사실 당신은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세상은 이미 그렇게 바뀌었거든요. 아주 오래전 누군가에게 어떤 얘길 듣고, 상처 받은 적 있으시지요? 지구 저 건너편에서 쓰인 책 한 구절을 읽고, 오래도록 잊지 못하는 것도 있을 테고요. 그런 것들은 모이고 모여 당신의 인생을 조금씩 바꿨을 텝니다. 사람이 모여 만드는 사회 역시 같다고 믿어요. 한 사람의 목소리가 부조리한 사회 제도를 바꾸고, 몇 사람의 목소리가 모여 부당한 편견과 불평등을 조금씩 지우고 있습니다. 세상은 오히려 한 번도 같았던 적이 없었을 겁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당신이 이 글을 본 지금도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는 옷을 사지 말아 보자.
어제 안 샀으니까 내일도 사지 말아 보자.
아! 오늘 하루는 베이컨을 빼 달라고 얘기해보는 거야.
오늘 하루는 동료들한테도 말해봐야겠다. 배달시켜먹지 말고, 포장해서 와 보자고."
안 될 때도 있을 겁니다. 타박이나 비판, 불필요한 조언을 들을 때도 있을 거예요.
그럼 집으로 돌아와 천장을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하면 되죠.
음... 그럼 내일은 이걸 한 번 해볼까?
절망과 희망 사이 비관과 낙관 사이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가더라도, 아무도 모르게 내 몸의 무게중심은 슬쩍 낙관 쪽으로 기대어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 물론 "쓰레기 팍팍 버려도 우린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야, 여태까지 잘 살아남았잖아?" 이런 인간(더 자세히는 돈 있고 권력 있는 인간)만 살겠다는 낙관 말고요. 내 삶을 가능하게 하는 이 바다도, 아스팔트 사이를 뚫고 자란 풀들도, 구석구석 안 궁금한 곳 없는 킁킁 대는 강아지도 모두 조금 더 나은 세상에 살 수 있게 해 보자, 왠지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는 그런 낙관이요.
끝내 죽음이라는 운명이 정해져 있음에도 오늘 하루 친구들과 떡볶이에 버터갈릭 감자튀김을 먹으려는 당신의 하루가 의미 있듯, 매일매일 오늘은 또 어떤 재앙이 뉴스 헤드라인을 차지할까, 마스크로 숨을 연명할 수 있는 건 언제까지일까, 내가 살아가는 이 미래가 지금보다 더한 재앙으로 가득 찰 걸 알고 있으면서도, 오늘 하루는 그냥 "비닐봉지는 괜찮아요."라고 말하는 당신의 실천은 여전히 의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거 한다고, 세상이 바뀔까요? 라며 고민을 털어놓는 당신은 어쩌면 이미 세상을 바꾸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