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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연 Oct 08. 2022

내 옷장에 거위 20마리가 산다

덕다운, 구스다운, RDS 패딩 

영국 고급 브랜드 버버리는 2018년 약 422억 원 상당의 재고를 모두 불태워 소각 처리했다. 5년간 소각된 제품의 추정 금액은 약 1천328억 원어치. 버버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카르티에, 몽블랑, 에르메스, 샤넬, 루이비통,…. 이들은 시장에서 팔리지 못한 제품을 회수해 다 소각했다. 낮에는 새로운 디자인과 컬러를 뽑아 공장을 돌리고 패션 매거진과 인터뷰를 하고, 밤에는 안 팔린 제품들을 소각장에서 불태우는 것. 이것이 명품 브랜드의 오랜 관행이다. 애써 송아지 가죽을 벗겨 신발을 만들고 그걸 다시 다 태워버리는 심보는 개성과 예술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올 해는 가을부터 날씨가 많이 춥다. 너도 나도, 자기 몸보다 더 큰 패딩을 입을 계절이 왔다. 100% 거위 솜털로 만들어진 1천만 원짜리 명품 패딩도 나왔다고 한다. 꼭 비싼 명품이 아니더라도, 5만 원짜리 패딩 제품 또한 “진짜” 덕다운, 구스다운, 라쿤퍼를 자랑하며 매장에 당당하게 걸려 있다. 직원은 "이 가격인데 진짜 털로 가득 찼어요. 한번 만져보세요."라고 말을 보탠다. "그러게요." 정말 궁금하다. 한 패딩을 만들기 위해서 20여 마리의 오리가 필요한데, 5만 원이면 되나? 천천히 패딩을 만져본다. 참 보드랍다. 고개를 들어 옆 매대, 건너편 매장을 살펴본다. 허리춤까지 오는 숏 패딩, 발목까지 덮는 롱 패딩, 퍼가 탈부착 가능한 디자인…. 수많은 '100%' 구스다운, 덕다운 패딩들이 옷걸이에 걸려 즐비해있다. 도살장에 거꾸로 매달려있는 동물 사체와 겹쳐 보이는 것은 착각이 아닐 테다. 


남기자의 체헐리즘: 남형도 기자 

한 패딩을 만들기 위해서는 20마리의 오리나 거위가 필요하다. 태어난 지 10주 된 때부터 오리는 죽을 때까지 가슴 털을 뽑힌다. 털을 뜯기는 고통과 충격으로 그 과정에서 죽기도 한다. 모자 장식으로 쓰이는 ‘리얼 라쿤퍼’는 식용으로 도살되지도 않아 사육과 도축 과정이 더 열악하다. 


이런 과정을 거쳤다면 적어도 누군가에게 추운 겨울바람을 막아주는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들의 죽음은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다 팔리지 않거나 유행 지난 패딩은 돌고 돌아 버버리코트와 에르메스 가방이 타들어 가던 그 소각장 한 켠으로 갈는지도 모르겠다.




패션은 예술이다. 어떤 재질의 옷을 입고, 어떤 색 조합을 선택하느냐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가성비 좋은 수단이다. 하지만 내가 딛고 서 있는 이 땅에 대한 배려와 이해 없이 무자비하게 만들어내고 더 무자비하게 없애는 기업의 물건을 소비하는 것은 과연 어떤 개성을 표현하는 것일까? 


미국의 아웃도어 제품 기업 노스페이스는 윤리적 다운 제품 인증(RDS·Responsible Down Standard)’ 패딩을 제작했다. RDS는 살아있는 새의 털을 뽑거나 털을 뽑을 면적을 늘리기 위해 강제로 음식을 먹여 살을 찌우는 등 동물을 학대하지 않고 만들어진 제품에 발행되는 인증마크다. ‘품절 대란’을 일으켰던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롱 패딩 또한 RDS 인증을 받은 제품이었다.


당신의 패션, 그리고 소비는 당신이 누구인지 보여준다. 패션은 예술이다. 

예술은 지극히 인간만의 것이다. 그래서 더 아름답고, 더 아름다울 수 있다. 

올해는 당신이 더 따뜻한, 더 아름다운 겨울을 보내시길 진심으로 바란다. 


사진 출처: 남기자의 체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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