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여행을 일주일 앞두고 목감기 기운이 도졌다. 평소 같으면 하루 이틀쯤은 타이레놀로 버텨볼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며칠 후면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갈 여행을 앞두고 있으니 서둘러 이비인후과를 찾았다.
심하지 않다며 항생제 없이 받은 처방은 아세트아미노펜. 이럴 거면 그냥 집에서 타이레놀을 먹었어도 되는데 싶은 맘이 잠깐 들었다. 게다가 기대와는 달리 약을 먹은 지 이틀 만에 오히려 증세가 확 심해졌다. 수요일이 되자 목이 잠기고 심지어 오전엔 쇳소리가 났다. 오후의 오카리나 수업을 쉬고, 처방약을 마저 먹었지만 안 되겠다 싶은 맘에 다음날 다른 병원을 찾아갔다.
목의 증세와 여행을 앞둔 이야기를 했더니 의사는 목 안을 꼼꼼히 여러 번 들여다보고는 말했다. “국내면 모르겠는데 해외를 가신다고 하니 항생제 처방으로 일주일 치를 드릴게요. 처음 3일 치는 ‘임팩트 있는’ 처방을 드릴거구요, 나머지 4일은 조금 낮춰서 약을 드릴게요. 항생제는 증세가 사라져도 반드시 처방받은 걸 다 드셔야 합니다. 여행 중에도 시간 맞춰 잘 챙기셔야 해요. “
의사는 행선지와 출발일을 자세히 묻고 처방을 해주었다. 처방전에 약 목록이 많아 보였지만 두 가지 처방이니 그런가보다 대수롭지 않게 넘긴 나는 약국에서 약을 받고는 그만 기겁했다. 한 봉지에 담긴 알약이 무려 9알이었다. 이쯤 되니 ‘감기 너, 어디 한번 먹고 죽어봐라!’라는 듯한 의사의 기세가 느껴졌다.
한편으론 이걸 다 먹고 내가 먼저 뻗는 게 아닐까 싶어 처방전을 다시 꼼꼼하게 보니 세 알은 위 보호제, 한 알은 항생제, 그리고 나머지는 소염제였다. 그나마 세 알은 위 보호제로군, 안심하다가 퍼뜩 다른 생각이 들었다. 아니 세 알씩이나 위 보호제를 먹어야 한다면 나머지 약들이 그만큼 독하다는 것 아닐까. 하지만 여행은 코앞이고 선택의 여지는 없으니 그냥 먹었다. 다행히 하루하루 눈에 띄게 나아졌지만, 밥 먹고 한주먹씩 약을 털어 넣는 나를 보고 남편이 심란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갖고 갈 수 있겠냐? “나는 호기롭게 대답했다. “당연하지. 낙장불입이야!“
의사의 임팩트있는 약 덕분인지 나는 무사히 여행길에 올랐다. 남은 처방약을 신줏단지 모시듯 챙겨 든 채로.
처음 타보는 에어캐나다는 연착과 결항, 그리고 짐 분실을 밥 먹듯 했던 과거 전력으로 ‘에어 개나타’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갈 때는 문제가 거의 없는 밴쿠버에서, 올 때는 악명높은 토론토에서 경유하는 노선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서의 변수라면 어찌 되겠지 싶은 심산이었다. 게다가 밴쿠버든 토론토든 늘 문제가 된 건 밤도착 노선이었는데 우리는 낮시간의 노선을 택했으므로 좀 더 안심하기도 했다.
단풍국의 국적기답게 붉은 단풍잎이 선명한 에어 개나타, 아니 에어 캐나다는 정시 출발해서 밴쿠버에 우리를 내려줬다. 심지어 밴쿠버에서 미국 입국심사를 했으므로 꽤 간단했다. 왜 왔니, 얼마나 있을 거니. 이 두 가지 질문이 다였다.
떠나온 곳의 시간과는 이미 한참 달라진 세상에 앉아 유리창 밖으로 낯선 비행기들이 뜨고 내리는 것을 바라봤다. 두 시간을 밴쿠버 공항에 있다가 바로 뉴욕으로 가는 다음번 비행기를 타기 위해 줄을 섰다. 이번에도 정시 출발이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가끔 좌석별로 탑승을 시키는 항공사들이 있다. 에어캐나다도 존 별로 탑승을 시켰다. 우리는 5존이었는데, 한 외국인이 우리에게 다가와 너희들은 몇 존이냐 물었다. 자기는 3존이니 한참 앞이겠다며 그 여자가 사라진 후 우리의 앞에 서 있던 미국인 할머니가 내게 물었다. “쟤가 뭐라고 한 거니?“
여행 다니다 보면 만국의 할머니들은 꽤 비슷한 점이 많다. 역시나 그 미국 할머니도 그랬다. 궁금한 건 물어야 하고, 괜히 참견도 하고 싶어 하신다. 그런데 미국 여권을 들고 있는 그 할머니의 말을 듣고 당황했다. 미국 사람이 지금 미국말을 못 알아들은 거야? 내 속내가 얼굴에 드러났던 걸까. 그 할머니는 덧붙였다. “여기 너무 시끄러워서 바로 앞사람 소리도 들리지 않아.“
두 번째 비행이 시작되었다. 밴쿠버에서 뉴욕까지 5시간 반을 날아가야 한다. 시차는 또 한 번 달라질 것이다. 떠나온 곳과 다른 시간으로 흐르는 세상의 하늘을 날아가며, 나는 의사가 지어준 ‘임팩트있는’ 약 한 봉을 들고 고민에 빠졌다. 저녁 약인가, 점심 약인가. 지금 여기는 오후이고, 떠나온 내 나라는 이른 새벽이다. 내 위장에 임팩트있는 그 약을 털어 넣기 위해 시간 계산을 하고 있는 사이, 비행기는 열심히 뉴욕을 향해 날아갔다.
졸다가 깨다가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는 게 느껴질 때쯤 눈을 떴다. 내 나라의 토요일 저녁 여섯 시에 떠나 밴쿠버까지 열 시간, 그리고 다시 다섯 시간 반을 더 날아왔지만, 이곳 뉴욕은 아직 토요일 밤 열 시였다.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처럼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한 뉴욕이 비행기 아래 있었다. 임팩트있는 여행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