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저장소
도쿄로 이른바 ‘혼여’를 떠났던 딸이 돌아왔다. 3박 4일간 움직이는 곳, 먹는 음식들을 계속 사진 찍어 보내와서 마치 같은 곳을 함께 다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혼자 떠난 딸의 캐리어는 무려 28인치였는데 반은 비어있는 상태로 갔건만 역시나 돌아올 땐 그 캐리어가 꽉 차고도 모자라 보조 가방까지 들고 있었다. 짐을 낑낑대며 들고 들어서는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나의 경우는 여행을 떠날 때 짐은 최소화한다. 자주 여행을 다니지만 뭔가 사 들고 오는 일은 별로 없다. 물건으로 남는 기념품보다는 하나 더 보고, 한 개 더 맛보고 오자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물건’에 대한 집착 내지는 열망이 사그라들었다. 이제 그런 나이인 걸까.
“젊을 때 하고 싶은 것 해봐야지” 하면서도 뒤이어 잔소리가 튀어나온다. “대체 뭘 이렇게 샀어. 죄다 쓸데없는 것들이겠네.”
딸은 캐리어를 뒤지더니 내 것이라며 몇 개를 내밀었다. 그중 하나에 눈이 꽂혔다. 기무라야 소혼텐의 단팥빵.
기무라야 소혼텐은 일본에서 제일 처음 개업한 빵집이라고 하는데, 도쿄의 긴자에 그 본점이 있다. 그 빵집은 특히 단팥빵이 유명하다. 나는 도쿄에 여행 갈 때면 꼭 그 집 단팥빵을 엄마에게 사다 드렸다. 엄마는 단팥빵을 워낙 좋아해서 늘 나는 ‘단팥빵 킬러’라며 놀리곤 했다.
사실 엄마가 좋아하는 건 단팥빵에 한정되는 건 아니었다. 팥으로 된 음식 대부분을 좋아했다. 팥죽, 팥 아이스크림 같은 것들. 나는 팥죽은 입에도 대지 않았었고, 비비빅 같은 팥 아이스크림보다는 우유가 듬뿍 들어간 소프트아이스크림이 좋았다. 얼마나 맛있는데, 하며 엄마가 단팥빵을 내밀고 팥죽을 끓여줄 때마다 안 먹어, 라며 도리질을 쳤었다. 그래도 여행길엔 유명하다는 집의 단팥빵을 사고, 팥 앙금이 들어간 만주를 캐리어에 챙겨 넣었다. 엄마가 단팥빵을 좋아하지, 하면서.
누군가에게 선물을 한다는 것.
누군가를 위한 선물을 고른다는 것.
진정한 선물이란 그렇다. 받는 사람만 즐거운 것이 아니라 주는 사람 역시 고르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그이가 좋아하는 것, 그이에게 어울릴 만한 것을 생각한다. 받는 이를 생각하는 것이 선물의 시작 아닐까.
하지만 이제 여행길에서 엄마의 선물을 고를 일은 없다. 단팥빵으로 유명하다는 집을 어디선가 만나도 감흥 없이 지나치기 일쑤다. 오랜 세월 고급 양갱이며 만주를 만들어 왔다는 집에선 진열대를 들여다보며 생각한다. 엄마가 있었으면 사 갔을 텐데.
서운한 맘이 먼저 들지만, 신기한 일은 나도 이제 단팥빵이 점점 좋아진다는 거다. 그뿐만 아니라 예전에는 동짓날이 와도 입에 대지 않던 팥죽을 아무 날도 아닌 때에 가끔 사 먹는다.
입맛이 바뀌는 것일까. 아니면 그리운 것일까.
어느 쪽인지 나는 알 수 없다.
딸의 캐리어에서 나온 기무라야 소혼텐의 단팥빵을 물끄러미 보다가 봉지를 뜯어 입에 넣었다. 상할까 봐 돌아오는 날 아침 일찍 긴자에 가서 사 들고 왔다고 딸이 하는 소리를 들으며 오물오물 단팥빵을 삼켰다. 달고, 맛있다. 그리고 맛 표현으로는 불가능한 감정이 뒤따라온다. 이를테면 그리움 같은 것.
배 속에 아기를 가진 엄마들이 생전 찾지 않던 음식을 찾게 되면 어른들이 말한다. 아기가 먹고 싶은 거야, 그건. 그러니 아기 가졌을 때 먹고 싶은 건 다 먹어야지.
뜬금없이 엄마가 좋아하던 음식이 먹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엄마가 지금 그게 드시고 싶은 것 아닐까. 뱃속 아기와 엄마가 입맛을 공유하는 것처럼, 엄마와 아이는 서로 분리된 이후에도 그 입맛이란 걸 기억하는 저장소가 있을는지도 모른다.
딸은 “하나 더 있어!”라고 외치며 작은 상자를 하나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우리 가족이 일본으로 여행할 때마다 주로 아침 식사를 하러 들렀던 곳은 ‘코메다 커피’였다. 딸이 내민 건 그 코메다 커피의 머그컵이었다.
오늘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 될 것이다. 딸과 공유하는 저장소에 쌓인 것들을 생각해본다. 무엇이든 좋은 것으로 많이 쌓아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