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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씨 Oct 26. 2021

아버지가 되어가는 밤

아이를 기다리며



 아내가 자고 있다. 옆으로 돌아 누워서. 만삭인 아내는 바로 눕지 못한 지 오래였다. 한 사람으로 거의 다 자란 아이의 무게가 폐와 장기를 누르기 때문이었다. 힘에 겨운지 간간히 신음소리를 흘린다. 출산일이 지나면 아내는 좀 편해질까? 적어도 가벼워진 몸으로 똑바로 누울 수는 있겠지. 그렇지만 나는 왠지 우리의 인생이 더 무거워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아이의 탄생을 앞두고 기다려지고 기대되는 마음과 더불어 중압감을 느낀다. 잘 해내야만 할 텐데... 부족하고 자질 없는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뒤척이며 끝나지 않는 걱정에 빛이 잠긴 새벽의 허공은 답을 말해주지 않는다. 그런데 잘하는 게 뭐지. 뭘 잘하고 싶은 거지? 아버지의 역할이 뭐지.


 아이의 존재를 알았을 때 마음속에서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은 이것이었다. 제대로 먹여 살릴 수 있을 것인가. 혼자서 자랄 수 없는 존재를 책임을 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사람이다. 경제적인 영역에서는 특히나. 아무것도 없는 카레 가루에 물을 풀어 끓여낸 국물로 밥을 비벼 먹으면서 직업을 갖고 돈을 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했던 때가 떠올랐다. 직장을 다니고 있는 지금, 방심한 마음에 발을 헛디디기라도 한다면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도. 사회와 세상은 맹수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정글 같은 곳이라는 점을. 과연 내가 아이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을까. 경제적 부족이 아내와 나 그리고 아이의 관계를 무너뜨리면 어떡하나. 살아남기 위해 거칠어진 우리의 영혼이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면 어찌하나.


 IMF 시기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또래들은 아마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감히 생각한다. 아버지의 실직, 공장의 폐업. 숨어 있는 아버지가 집으로 찾아온 빚쟁이에게 날 대신 내보낸 것, 전화에 대고 같이 살지 않는다는 거짓말을 종용하던 것. 집 안을 담배 연기로 가득 채우기만 하는 무기력한 얼굴. 술에 취해 뱉어내는 한탄. 퇴근한 어머니의 지친 얼굴. 서로를 향한 비난과 쓰러진 김치찌개 그릇에서 흘러내린 장판 위에 뻘건 국물 같은.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돈으로 인해 최후를 맞이했던가. 생존에는 그 역사가 있다. 나에게도 역사가 있다. 역사는 미래를 예측하는 힘이다.


 돈을 벌지 못할까 봐 두렵다. 경제적 소임을 다하지 못해서 찾아오게 될 가정의 파국이 무섭다.


 주변에서 아버지가 된 사람들이 웃는다. 그들의 눈에는 행복함이 담겼다. 두렵지 않나? 자신감이 넘치나? 세상이 만만해 보이나?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찾아가서 묻고 싶다. 따지고 싶다. 당신은 왜 불안하지 않은 것인지. 불안하다면 어떻게 그렇게 기뻐할 수 있는 거냐고.


 문득 궁금하다. 어느 정도까지의 사람이 되면 괜찮은 아버지인가. 어디까지 해내지 못하면 부족한 것인가. 어떤 상황은 가정의 파탄으로 이어지는가. 가족의 결속을 결정하는 것은 경제력인가. 의문이 든다. 가족은 돈으로 묶인 공동체인가.


 대체 내가 두려워하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혼란스럽다. 돈만 있으면, 경제적 풍요를 지켜내면 나는 좋은 아버지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아닐 텐데, 가족 구성원은 돈으로 묶인 것이 아닐 텐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욕설을 내뱉는다. 소리를 지르며 비난을 퍼붓는다. 무능함을 탓하고 사건의 원인으로 자신이 고른 배우자를 지목한다. 부모에 대해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피하고 싶어도 귀를 닫을 수 없는 아이가 신세를 한탄한다. 살이 아프면 쓰다듬기라도 할 텐데 보이지 않는 영혼의 고통은 어루만질 수도 없다. 아이가 그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서로를 향한 따뜻한 말이었는데, 쓰다듬이었는데. 그건 말하자면 사랑이었다.


 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여전히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오히려 돌보지 않은 상처는 덧나서 나의 배우자와 자녀, 가정, 무엇보다 내게까지 비릿한 진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이의 탄생이라는 큰 기쁨을 누리지도 못하게 말이다. 창문을 넘어 비치는 달 빛이 두려움의 실체를 벗겨내고 있었다. 가족의 해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어린아이의 고통이었다.


 그들은 돈이 없는 상황에서도 서로 사랑했어야 했다. 무엇보다 가족의 아픔을 자신의 괴로움보다 크게 봐야 했다. 배고픔이 사랑하지 않는 이유가 되지 않음을 깨달았어야 했다. 가난이 아니라 그들의 결정이 가족을 해체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내게 제대로 설명해줬어야 했다.


 내가 아는 누구도 삶이 이어지는 동안 경제적 풍요를 보장받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사랑할 사람을 만나고, 찾아온 생명을 기뻐하고 함께 살아간다. 그들이 불확실한 인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경제적 보장 같은 것이 아니지 않았을까. 다만 자신을 이유 없이 사랑해줄 사람이 있다는 것과, 자신도 이유 없이 사랑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나의 인생과 가정, 아내, 축복과도 같은 새 생명의 행복이 빈약한 나의 경제력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큰 감사이자 위로인지. 우리의 삶이 서로 얼마나 사랑할 것인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사실은 앞으로의 인생을 두고 얼마나 큰 용기를 갖게 하는지. 그날 밤, 나는 경험할 수 있었다.


 아내의 배 위로 흘러내린 이불을 다시 덮어준다. 이불속으로 손을 넣어 둥그런 배를 어루만진다. 착각인지도 모르지만 아이의 움직임을 느낀다. 막연한 두려움이 걷히자 빨리 아이를 만나고 싶어졌다. 아이가 태어나면 나도 다른 아버지들처럼 행복한 눈빛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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