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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씨 Nov 12. 2021

사랑하기 위한 조건

순수한 사랑을 담아서


트라우마가 있다. 아직 어디서부터 생겨서 어떻게 발전한 것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알아낸 것이 있다면 그것이 나에게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지, 내 삶을 어떻게 비틀어 놓았는지에 관하여다.


'사람들은 나를 싫어할 것이다.'


눈치를 본다. 내가 한 행동을 옆에 있는 사람이 불쾌해하는지, 괜찮게 여기는지. 약간이라도 부적절한 것 같으면 굉장한 불안이 밀려온다. 그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 정도인 듯하다. 옆 사람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기 위해 과도하고 과장된 노력을 하거나 아니면 나를 감추고 숨는다. 드러나지 않으면, 다시 말해 옆사람이 나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싫어할 수 없다. 숨는 것은 어찌 보면 제일 효율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안타까운 사실은 보통의 옆 사람은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 자기 앞을 바라볼 뿐이다.)


다른 말로 표현해보면 '불신'이라고 할 수 있다. 함께함을 믿지 못하고, 받아들임을 믿지 못한다. 호의를 그대로 여기지 못하고 사람과의 어울림에 불안을 느낀다. 추측하기로는 가정에서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경험이 부족하고 오히려 조건부 허용으로 인해 형성된 심리 상태일 것이다.


왜, 나는 지금 이런 이야기를 쏟아놓는가. 그것은 해결하지 못한 트라우마의 무서움을 몸소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막 열흘을 살아가고 있는 아이를 품에 안았다. 아직 목을 가눌 수 없으므로 안는 사람은 아기의 목과 허리를 꼭 받쳐줘야 한다. 아이는 세상이 신기한지 이곳저곳 눈을 굴리며 관찰한다. 순수한 아이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작은 일이 행복하다. 나의 눈동자를 쳐다보는 아이의 눈동자에 빠져든다. 아이와 나는 교감을 나누는 것일까. 알 수 없다.


서로의 눈이 교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중에 아이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긴다. 조금 더 바라보고 싶었는데 아쉬움이 든다. 섭섭해지는 마음에 아이가 나를 바라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닐까, 아이가 나의 존재를 싫어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이어진다. 괴로워진다. 존재가 부정되는 것 같다.


그러나 객관적 사실이 무엇인지는 명확하다. 아이에게 나라는 존재는 모든 것을 의지하는 부모이다. 어쩌면 아직 내가 아빠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아니 사물과 사람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 존재가 무얼 싫어한다는 말인가. 무얼 부정한다는 말인가. 알고 있다. 그는 신생아다.


아이를 사랑하기 위해서, 아이가 주는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 나는 상처 받은 나를 계속 치료해가야 한다는 것을 무섭도록 깨닫는 순간이었다. 내가 아이와 존재와 존재로써 서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함께 돌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오늘 밤, 다시 아이의 눈동자를 바라볼 것이다. 순수한 사랑을 담아 바라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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