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감정들은 키트라서 개별 구입이 안됩니다.

전부 겪어내셔야 합니다. 감당하거나 버티실 필요는 없습니다.

by chul

내가 못하는 거, 정말 많지만 그중 유난히 '건강한 기대'를 못 한다. 바라지 않으면 안 됐을 경우 데미지가 0이고, 잘 되면 플러스니까. 만약 기대를 했다면 안 됐을 경우 데미지가 마이너스가 되고 되었다면 0이 되니까 손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예전부터 유행하던 '미라클 모닝'이니 'R=VD'라니, 이제야 그런 것들을 접하기 시작했다. 이 둘의 공통점은 '미리 되고 싶은, 하고 싶은 자신의 모습이나 행동을 이야기하거나 시각화하는 것'이다. 기대하지 않는 환경에서 '의외의 기쁨'만 추구했던 내게는 신세계이자 충격이었다. 아니, 그렇게 바래서 그게 가능해? 가 아니라, 감히 내가 '미리 바란다고?'. 그걸 심지어 말하거나 적거나 그런다고? 그러다가 안되면 어떻게 해, 그 모든 실망과 아픔을 다 겪어야 하잖아, 기대하면서 걱정도 했을 텐데, 결과가 나오기 전과 후 너무 감정 소모가 심하잖아.

그렇다. 이 모든 것은 하나의 키트였다. 개별 구입이 되지 않아서 선택할 수가 없었다. 전부 겪어내야만 했다.

나는 항상 기대하지 않은 것이 잘 되었다. 기대하면 걱정했고 그러면 긴장해서 실패했다. 그게 반복되자 나는 하고 싶은 것보단 할 수 있는 것만 최소한으로 계산하여 기대했다. 그러나, 평생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그렇게 과거의 나는 꿈 많던 어린아이로 살 수 없었고, 그런 내가 포기한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

공고를 보면서, 자소서를 쓰면서, 진심으로 말하고 생각했다.

나는 정말, 이 일이 하고 싶어.

이 회사에 들어가고 싶어.

많은 것들 중 아무거나 상관없는 게 아니라, 이 일이 하고 싶고, 이것이 갖고 싶어.

이 말을 한 순간, 나는 자유로워졌다. 내가 감히 바래고 기대해도 될까? 내 앞날이 좋아질 거라고. 기대하고 걱정하고 긴장하고 잘 안 됐을 경우엔 실망하고 아파하고 또다시 기대하면서 그 모든 감정 키트를 겪어낼 각오가 되어있나? 아니, 각오할 필요는 없다. 감정은 극복하거나 버티는 게 아니라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거니까. 그러니까 너무 비장하게 살 필요는 없었다. 일은 일어나고 시간은 지나가고 감정은 생겨난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잘 살고 있다. 해야 할 일 하면서. 작년과 다른 점은 나는 기대를 하고 있고, 그 기대를 위해 달려 나가거나 최선을 다하고 있다. 사실 아직은 허황된 욕심과 건강한 기대를 구분하지 못하겠다. 그래도 20대 후반이 쭈뼛쭈뼛하면서 '제가 이거 좀... 하고 싶은데요... 처음 말하는 거예요...'라면 나름 성장한 게 아닌가? 쿨한 척은 분리수거까지 확실하게 해서 버리기로 했다. 나이가 들수록 신기하게 겉멋은 없어지고 솔직해지고 대책 없어지는 것 같다. 이것도 내가 유난한 인생을 살아서 그런가? 무섭지만 바라고, 바라는 과정에서 오는 감정의 폭풍전야와 후폭풍을 모두 겪어내고, 너덜너덜해졌다가 또 바라고 달려가고.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이 과거에 내가 가장 한심하다고 생각한 상황과 상태임에도, 나는 내 인생 중 가장 활력 있게 보내고 있다. 정말 유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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