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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garden Mar 15. 2020

영어를 거부하는 아이가 산드라 오를 보고 질문했다

엄마의 해결책은 때로는 상황을 악화시킨다


둘째는 만 1세 때 자메이카로 건너갔다. 만 5세 생일파티를 막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왔으니 4년간 자메이카에서 산 셈이다. 자메이카는 영어를 쓴다. 영국의 클래식한 발음이 은 영어다. 아이는 만 2세가 조금 넘어 프리스쿨을 가기 시작했다.


둘째의 등교 첫날, 형아와 함께, 자메이카, 2016


그전에 베이비 시터에게 가끔 영어를 들었겠고, 티브이에서 나오는 영어도 함께 들으며 자랐다. 베이비 시터는 산책을 하며 딱딱한 나무를 만지며 hard라고 했고, 옷을 만지작 거리게 하며 soft라고 했다. 티브이로는 페파 피그와 옥토넛을 주로 보았고 그 외에도 Paw Patrol, Umizumi, Dora, Wiggle Giggle 등 수없이 많은 프로그램들을 형과 함께 즐겼다.


둘째 아이는 언어 감각이 좀 뛰어나다고들 했다. 예를 들어, 비가 오다가 그쳐 바깥에 함께 나갔더니 아이가 "엄마, 비가 안 오네."라고 했다. 내가 "그렇네, 비가 그쳤네."라고 했다. 몇 시간 후 밖에 나갔더니, 아이는 "엄마, 비가 그쳤어."라고 했다. 아이는 옆집에 사는 같은 나이 친구들에 비해 영어를 빨리 습득했고, 말을 더 잘하는 아이는 친구와 놀이를 할 때 리더 역할을 다. 구 엄마는 나에게 아이의 영어 말하기를 보며 부러워했다. 그녀는 좀 조기교육에 열심인 중국인 엄마였다. 나에게 피아노 레슨을 부탁해서 만 4세인 아이를 가르치게 했다. 사실 나도 고슴도치 엄마지만, 우리 아이가 그렇게 잘하나 잘 인정되지 않았다. 좀 점수가 짠 편이다.


그런 아이가, 한국에 와서는 영어를 거부했다. 물론 유치원에서 영어로 노래를 배우고 따라 했지만 집에서 영어책을 읽는 것을 거부했으며, 내가 큰 욕심을 버리고, 자기 전 영어책 읽기만 해 보자고 시했을 때 아이는 적극적으로 영어를 거부했다. 영어로 이야기하는 나에게, 아이가 말했다.


엄마, 여긴 한국이잖아. 그런데 왜 영어로 이야기하는 거야?



'니 영어가 아까워서. 그래서 엄마가 욕심을 좀 부리는 거란다'라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냥 "영어를 잊지 않고 하면 좋을 것 같아서"라고 뱉은 짧은 몇 마디는 아이를 설득하지 못했다. 아이 말이 맞았다. 여긴 한국이잖아.



맞다, 내 욕심과 조바심만 버리면 아이들은 잘 클 거야


아이는 좀 집요한 편이다. 그 집요함이 나를 뛰어넘는다. 내가 계속 영어로 말하면서 농담으로 "엄마는 9시가 넘으면 미국 사람으로 변해. 그래서 한국말을 못 하는 거거든."이라고 농담을 했는데, 남편과 첫째는 그 말에 빵 웃음을 터뜨렸지만, 둘째는 끝까지 여긴 한국이니 한국말로 하라고 집요하게 요구다. 영어책 읽기도 좋아하지 않았다. 욕심도 버리고 아주 짧은 책 2권만 딱 읽어주고 자려고 했는데 그것마저도 거부했다. 관련해서 전문가인 브런치 작가, 해나 에메랄드스프링스님께 자문을 구했더니, 엄마의 조급함을 버리라고 하셨다. '맞다, 내 욕심과 조바심만 버리면 아이들은 잘 클 거야'라는 생각에 '9시 미국인 되기 프로젝트'몇일만에 마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웃긴 일이었다. 9시에 영어를 쓰는 사람으로 변신하는 엄마라니 얼마나 어색하고 희한한 일이란 말인가. 아이가 거부하고도 남았을 일이다. 반성한다.


그 뒤로 아이가 아이패드를 가지고 놀 때면 '영어 콘텐츠를 보면 좋을 것 같아'라고 대놓고는 말하지 못했지만 살짝살짝 그런 콘텐츠를 유도하고는 했다. 그냥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다시 보기 시작한 미국 드라마가 있는데 그게 바로 '그레이 아나토미'다. 물론 아이가 보기에 적합한 드라마는 아니다. 낮잠에서 깨어난 아이가 화면에서 산드라 오(크리스티나 역)를 보고 물었다.


엄마, 저 아줌마는 한국 사람 같은데 왜 영어를 써?


어떻게 알았어? 저 아줌마 정말 한국사람이야. (그리고 캐나다 사람이지)


그런데 왜 영어로 말해?


어, 한국 사람인데 캐나다에서 태어나서 영어를 어릴 때부터 써서 그래. 한국말도 잘하지만 영어를 더 잘해.


아이는 넋이 나간 듯, 산드라 오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사건 이후로 거짓말같이 영어 거부하기가 사라졌다. 설득하려고 해도 되지 않던 설득이 그레이 아나토미를 봤던 5분여만에 해결된 것이다.


물론 사라진 영어 거부하기가 곧 되살아나면 곤란한 일이 되겠지만, 한국인인데 영어를 모국어처럼 하는 산드라 오를 만사건은 꽤 아이에게 큰 것으로 다가왔나 보다.  미드가 내 고민을 한 방에 해결할 줄이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저 표정, 안그래도 좋아했는데, 좋아하는 이유 한 가지 더 늘었다 (이미지 출처: gettyimag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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