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그림에 대한 생각은 막연한 동경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언젠가 다시 꺼내 볼 '인생의 숙제'라는 상자의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죠. 은퇴 후 무엇인가를 한다면 그림을 배워보리라고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쩌다가 한 번씩 그림을 그려보긴 했지만 그것은 '디지털'에 한한 경우였습니다. 디지털 그림에는 무한 수정이 가능하였죠. 마음에 들지 않은 선은 마음에 들 때까지 고치면 될 뿐이었습니다. 채색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한 디지털의 특성 때문에 어쩌다 그림은 그리지만 간단한 그림을 하나 그리더라도 마음에 들려면 몇 시간이 걸리곤 했습니다.
[카페 디지털 드로잉 - 2015.12.31]
당시 아이패드의 드로잉 앱들에 제공되어 있던 샘플 그림들을 보면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나도 그려보리라 마음먹고 그려봤는데, 시간 대비 퀄리티는 너무나 미흡해 보였습니다. 위의 그림도 먹음직스러운 눈 앞의 빵을 그리려 한 것이었지만 참... 그렇게 한 번씩 마음에 들지 않은 그림을 그리면 또 한 참을 덮어두곤 했습니다.
음? 뭐지?
어느 날 무심코, 지금은 잘 기억나지도 않는 검색어를 통해 연결된 한 블로그에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블로그는 멋진 글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그림이 함께 하고 있었는데요. 펜과 수채화의 조합을 통해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나가시는 '제주유딧'님의 블로그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토록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계시는데 블로그 글들을 읽다 보니 그림을 전공하신 분이 아니신 거예요. 심지어 초기의 그림들까지 블로그의 여정이 이어지는데 '그림을 그리고 싶다.' '아름다운 제주를 그림으로 보여주고 싶다.'로 시작하신 그림의 발전이 믿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제주유딧님의 블로그에 빠져 있다가 여러 댓글들을 통해 또 알게 된 분이 있었습니다. 그림에 대한 열정과 탐구가 가득한 '배아'님의 블로그였습니다. 이 분도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 오시는데 마찬가지로 그림을 전공하신 분이 아니신 거예요. 그럼에도 그림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이분들의 그림에 대한 애정이 거의 모든 글에서 너무나 잘 묻어나는데 그림이 없으면 마치 숨을 못 쉬실 거 같은 느낌마저 들 정도였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가 그토록 행복하고, 그림을 통해 쉼과 위로를 얻는다는 이야기는 그림에 대해 어떤 두려움마저 가지고 있던 제게 매우 생소하고 충격인 표현이었습니다. 게다가 수채화라니? 수채화가 그렇게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것인가? 전공자가 아닌 사람이 즐겨 그릴 수 있는 그런 존재였던가?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간의 제 경험상 수채화는 그림의 가장 어려운 장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고 이는 제게 절대불변의 진리와도 같았습니다. 은퇴 후 그림을 배워보리라 했던 저의 막연한 상상에서조차 그곳에 수채화가 서 있을 자리는 없었습니다.
두 분의 블로그에서 힌트를 얻어보고자 많은 글들을 진지하게 정독할수록 왜? 어째서? 이럴 수가? 의 질문들이 넘쳐 났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실마리를 얻게 되었는데 두 분의 그림 여정에 어떤 공통분모가 있는 것이 보이더군요.
1. 작은 스케치북을 쓰고 있다. 글들을 통해 이것이 a5 사이즈 (21cm*14.8cm)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 방수 잉크를 사용하여 주로 만년필로 드로잉 후 수채로 채색한다.
3. 될 수 있는 한 많이, 주기적으로 그린다. 여행 시는 물론! 이거니와 밥을 먹을 때도! 마실을 나갈 때도! 차를 마실 때도!
이때가 2016년 10월이었습니다. 마침 곧 일본으로의 출장 여정이 잡혀 있어서 아이패드를 챙겨 갔고 저 또한 그분들처럼 그려보려 했습니다. 결과는... 보시죠...
[동경 숙소 디지털 드로잉 - 2016.10.12]
참담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려놓고 실소가 나오더군요. 몇 장의 그림을 더 그려봤지만 아주 실망스럽거나 또 예전처럼 수정하고 수정하고 또 수정하고를 반복하고서야 야~~악간 나아지는 정도였습니다. 두 분의 블로그를 통해 놀랐던 사실 중 또 하나는 그림 그리는 데 걸리는 시간이었는데요. 1시간~1시간 반 사이에 그토록 멋진 그림을 그리시는 거예요. 심지어 빨리 그리신 그림은 1시간이 채 되지도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제가 디지털로 수정에 수정을 거치는 경우 아무리 빨라도 2시간이 넘게 걸렸습니다. 밑의 그림은 2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걸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동경 야사쿠사 거리 디지털 드로잉 - 2016.10.18]
"이런 맙소사... 이건 아닌데... 그토록 많은 수정을 거쳐 그리는 느낌이 이 정도라니..."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후에 알게 된 부분이지만 디지털 그림과 손 그림의 어떤 차이가 있더라고요. 이 부분도 나중에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도 맘에 안 들게 오래! 그려지다 보니 또 몇 개월 그림을 덮게 되더군요. 그러다가 해가 바뀌어 2017년이 되었습니다. 신년 개인 목표를 생각해 보는데 다시 그림 생각이 들어 마지막으로 그렸던 그림들을 다시 꺼내 봤습니다. 답답했습니다. 답답하다 보니 슬그머니 재료 탓?을 하게 되더군요.
"그래, 그분들은 디지털 드로잉을 하지 않았어. 그럼? 나도 스케치북을 사볼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후 두 분의 블로그 중 재료에 대해 이야기하신 부분을 열심히 찾아봤습니다. 여러 후보군이 있었는데 최종적으로 배아님이 추천하신 클레르퐁텐사의 골드라인 스케치북을 구매해버렸습니다. 이 스케치북이 도착한 이후 제 삶은 그림과 본격적인 밀당을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