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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한 Oct 20. 2020

#03. 손 그림의 시작

 드디어 고대하던 스케치북이 도착했습니다. 첫 포장을 뜯는 순간 느꼈던 흥분과 설렘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며칠간 스케치북을 만지작 거리며 예전에 선물 받았던 LAMY Logo 만년필도 꺼내 봤습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었는데 써보니 오! 아직도 잉크가 남아 있더군요. 그러나 잉크 컬러가 레드라서 스케치북의 첫 장에 그릴 그림의 색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퇴근하는 길에 한가람 문구에 들려 만년필에 대응하는 블랙 잉크 카트리지를 구매한 교체했습니다. 드디어 준비는 끝났습니다. 뭘 그릴 지만 정하면 되었는데 개인 첫 스케치북의 첫 그림이다 보니 이를 고르는 것도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고요. 그러다가 지금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내는 곳을 그리면 현재의 나를 표현하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런 대상으로 사무실 책상이 생각났습니다. 다음 날 출근하여 점심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2017.01.19 드디어 저를 위한 첫 손 그림을 그렸습니다.


[사무실 책상 펜 드로잉 - 2017.01.19]


 그런데 아뿔싸... 분명 블랙 잉크로 갈아 끼웠음에도 잔여 레드 잉크가 남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 레드 라인으로 그려져서 당혹스러웠네요. 어찌 보면 당연한 부분이었는데 볼펜 컬러 심을 갈듯이 즉시로 잉크가 바뀔 것으로 생각했었던 거 같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리는데 이번에는 잉크 색이 점점 더 블랙으로 변화되는 것이었습니다. 진한 블랙이라기보다는 레드와 블랙이 섞인 브라운의 느낌이랄까요? 디지털이었으면 당장에 수정할 부분이 스케치북에서는 불가능하였습니다. 너무 이상한 듯하여 밑에 코멘트를 달았는데 이상해진 같더라고요. 하지만 지금 보니 추억이 됩니다.


 그간 디지털로 그리는 경우 시간이 많이 걸렸고 사무실 책상 위의 다양한 오브젝트들을 그려야 했던 터라 며칠간의 점심시간을 사용해야 할 것으로 봤는데 음? 점심시간 내에 완성이 되었습니다. 많이 미흡하지만 그래도 나름 디테일하게 그린다고 그렸는데도 말이죠. 이때 깨달은 것이 수정하지 않고 바로 그리는 그림은 시간이 훨씬 절약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게 그려도 쉽게 버릴 수 있는 낱장의 종이를 사용하지 않고 스케치북을 사용한 것과, 펜으로 바로 그린 것을 통해 놀랄 만큼 시간을 단축시킨 것이죠. 여기서 디지털 드로잉의 장점이자 단점 하나를 인지할 수 있었는데요. 그것은 디지털 드로잉의 경우 거의 무한 수정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수정이 보장되기에 거침없이 마음껏 그릴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장점인 동시에 또 다른 의미로 '수정의 노예'가 되는 단점이 되기도 한 다는 것을 이때 확실히 알게 되습니다.


 첫 그림에 도전하면서 지우개를 쓰지 않고 펜으로 바로 그리게 되었는데요. 그동안 손 그림을 그리기 위한 준비과정에서 참조하게 된 그림 선배 분들이 그렇게 그리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하는 데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실제로 직접 경험해보니 분명한 이유가 있더라고요.


지우개를 치우십시오.


 처음 그림을 그리시는 분들께 제가 가장 많이 강조하는 것은 지우개를 치우고 펜으로 그리시라는 것입니다. 연필 드로잉이 좋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 연필을 쓰시더라도 지우개는 치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세 개의 손을 그린 것과 같은 어이없는 상황이 아닌 이상 지우개는 멀리 치워두는 것이 좋습니다. 지우개를 치웠을 때 생기는 이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우선 그림은 제도가 아닙니다. 극 사실주의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닌 이상 원본을 그대로, 정확히 옮길 필요가 없습니다. 지우개를 치우는 것은 정확하진 않지만 자연스러운 선을 쓰기에 유익합니다.


2. 선에 책임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 선이 형태적으로 정확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선을 남발해서는 안됩니다. 지우개가 있을 경우 불필요한 선이 많아져도 지우면 그만이기 때문에 선을 남발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3. 선에 자신감이 생깁니다. 지우개를 쓰지 않고 펜 혹은 연필로 선을 긋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중요한 오류가 아닌 경우 좀 이상하게 그어진 선도 그림의 일부가 됩니다. 그리고 그 선 하나로 그림이 잘못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오히려 굉장히 개성 있는 그림이 되고 이런 경험들이 쌓이다 보면 확실히 선을 쓰는 것에 자신감이 생기게 됩니다.


[베네치아 산타 마리아 델 살루테 성당 펜 드로잉 - 2020.02.25]


 자신이 쓰는 선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되면 어떤 선이 잘못 그어지는 것에 대한 부담이 확실히 줄고 선을 잘못 그었더라도 근처에 다른 선을 그어 대담하게 그림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위의 성당 드로잉 중 어떤 라인도 제도 라인과 같은 치밀함과 정확함이 있지는 않습니다. 직선도 없이 구불구불하죠. 그러나 그런 자유로운 라인들이 성당을 묘사하기에 부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만의 '그림 지문'들이 가득 묻은 개성 있는 드로잉이 됩니다. 같은 이유로 직선인 건물을 그리시더라도 자를 쓰지 않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지우개와 자는 멀리 치워두십시오.


 첫 그림을 그리고 난 후 마음에 썩 들지는 않더라도 스케치북의 첫 장을 채웠다는 뿌듯함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흐름을 끊지 않고 그다음 장을 채우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아직 수채화는 엄두도 못 내지만 재료에 대한 포스팅에서 눈 여겨봤던 물붓(붓대에 물을 넣을 수 있도록 만들어 붓대에서 공급되는 물로 수채화를 그릴 수 있게 만든 붓. 쉽게 잉크를 넣어 쓰는 만년필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도 구매하여 테스트해봤습니다.


 당시 수채물감을 구입하지 않았던 터라 채색은 수채 색연필로 칠한 후 물붓으로 문질러 색을 번지게 하는 식으로 진행했는데요. 몇 장의 그림을 그리다가 문득 정말 기억에 남았던 여행의 한 장면을 그려보고자 했습니다. 제주유딧님이나 배아님이 그리셨던 것처럼 여행지의 모습을 그림으로 담아 보려는 시도였죠.


[마우이 해변 펜 드로잉 + 수채 색연필 채색 - 2017.01.23]


 이 그림을 그리고 제가 좋아했던 열대 바다의 느낌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있는 모습에 참 아쉬웠습니다.  열대 바다의 그 어떤 감동도 표현되지 않은 느낌이었죠. 그러나 예전 같으면 그 후 한참을 아무 그림도 안 그렸을 터인데 '스케치북'에 그리다 보니까 마음에 들지 않은 그림이 그려져도 스케치북을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들더라고요. 사이즈도 a5로 작은 편이라 평소 사용하는 가방에 넣어도 부담이 없었고, 어디든지 들고 갈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스케치북이 가진 작지만 긍정적인 힘이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하더군요.


 그림에 관심이 있으신 분, 언젠가 그림을 그려보고 싶으신 분들은 a5사이즈의 스케치북을 구매하시길 추천드립니다. 그림을 막 시작하시는 첫 스케치북의 경우 채색을 고려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브랜드도 상관없습니다. 드로잉 스케치북을 구매하시되 매수는 20매 정도면 적절하다고 봅니다. 그 정도면 채우기에 부담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첫 스케치북이 무려 128매 여서 한 권을 채우는 데 6개월이 걸렸습니다. 너무 많은 양은 지치실 수도 있습니다. 구매한 스케치북을 보고 있으면 손이 가고 스케치북을 그림으로 채우고 싶어 지실 거예요. 여기에 가지고 있는 만년필, 볼펜, 연필 어느 도구로도 그림을 그려나가실 수 있습니다.


a5 사이즈의 스케치북을 구매하십시오. 본인을 위한 그림을 그리실 첫 단계가 준비되신 것입니다.


 스케치북이 도착하면 지우개는 멀리 치우고, 펜이나 연필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간단한 사물부터 그려 보십시오. 작은 것부터 시작하여 조금씩 범위를 확장하여 그리는 것이 좋습니다. 이를테면 핸드폰 -> 핸드폰이 있는 책상 -> 책상이 있는 공간으로 점차적으로 확장하여 그리는 것입니다. 그림이 재능 있는 특별한 사람들이나 그림을 전공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본인을 위한 것임을 분명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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