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본인이 그려오고 있는 그림의 스타일이 익숙하고 편해서 그것을 본인의 선호 스타일로 생각하시는 경우가 있는데요. 바로 저 또한 그랬습니다. 그런데 선호 스타일과 그리고 있는 스타일은 같을 수도, 같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리고 있는 익숙한 스타일과 자신의 선호 스타일이 같은지 꼭 확인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이 같은 경우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둘이 다를 경우는 그림을 그리시며 항상 뭔가 만족이 안 되는 것이 있을 거예요. 이상의 그림과 현실의 그림의 방향성이 아예 다르기에 그림을 그릴수록 '잘 그려지긴 한 거 같은데 뭘까? 왜 마음에 감동이 없지?' 하는 생각이 드실 수밖에 없습니다. '오브젝트 중심' 스타일과 '빛과 어두움 중심' 스타일이 어떻게 다르고, 얼마나 다른지를 그림의 첫 시작인 스케치에 대한 두 수채화 마스터님들의 이야기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연필 데생에 전체를 그리는 시간의 2/3를 투자한다.
일본의 수채화 마스터 중 한 분인 오쿠쯔 쿠니미치(奧津國道, Okutsu Kunimichi)님은 그분의 저서 '수채화 프로의 숨겨진 비법'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셨습니다.
데생은 밑그림이긴 하지만, 투명 수채화일 경우, 채색을 해도 연필 데생 선은 비쳐 보인다. 특히 나처럼 강하고 명쾌한 선으로 그리면 연필 선과 채색한 색깔은 하나가 되어 그림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된다. 다시 말해 데생은 밑그림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완성된 선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필 데생에 정성과 시간을 들여 그린다. 6호 사이즈의 풍경화라면, 그리는 데 약 3시간 정도 걸린다. 그중에 연필 데생에 걸리는 시간은 약 2시간이다. 다시 말해 전체 시간의 2/3를 연필 데생하는 데 투자하는 셈이다. 들이는 공으로 치자면 80% 정도일까. 나는 데생할 때, 눈으로 열심히 관찰하면서 전력을 다해 그린다. 풍경과 진검 승부하는 듯한 마음가짐으로 그리기 때문에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으며, 대충 그릴 수도 없다. 아마 그때의 표정은 너무 진지한 나머지 무서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연필 데생을 끝내고 채색에 들어가면 갑자기 긴장이 풀리면서 가볍고 즐거운 마음에 콧노래까지 나온다. 연필 데생을 할 때는 멀찌감치 서서 구경을 하던 이들도, 채색을 시작하면서 부드러워진 내 표정을 보고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기도 한다. 다시 말해 그만큼 연필 데생에 힘과 정성을 80% 이상을 쏟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몬트리올 성당 펜 앤 워시 드로잉 - 2020.01.06]
그럼 다음의 이야기를 들어보시겠습니다.
스케치는 간략할수록 좋다. 구도의 체크, 하이라이트의 표시 정도면 충분하다.
위의 이야기는 캐나다 수채화 마스터이신 마이클 솔로브예브(Michael Solovyev) 선생님께서 수업 시 많이 강조하셨던 부분입니다. 감사하게도 캐나다 몬트리올로 이주한 이후 마이클 선생님께 수채화 수업을 받고 있는데요. 수업 중 처음 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참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그전에 저는 스케치에 대해 오브젝트 중심 스타일의 이야기만 들어봤었거든요. 마이클 선생님 외에도 Alvaro Castagnet, Andy Evansen, Hazel Soan님 등 많은 수채화 마스터 분들이 동일하게 이야기하시고 계십니다. 이 스타일의 경우 그림을 집, 건물, 사람 등의 오브젝트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빛 그룹과 어두움 그룹으로 그룹화하여 표현하는데요. 하나하나 오브젝트의 형태가 구분되어 분명하게 표현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집이 길과도 연결되고, 사람과도 연결되고 산과도 연결되며 큰 덩어리로 단순화하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그룹화를 통해 빛과 어두움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스타일의 아티스트분들은 그림을 그릴 때 가장 중요한 소재는 사람도 풍경도 아닌 '빛과 어두움'이다.라고 이야기하죠. 이 스타일에 해당되는 저의 그림입니다.
[겨울의 등대 하우스 수채화 - 2020.06.17]
오쿠쯔 님이 재밌는 수치를 예로 들으셨는데 80%의 비율 혹은 그 이상으로 스케치에 공을 들이신다고 하셨죠? 그렇다면 채색에 공을 들이는 비율이 20% 혹은 그 이하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마이클 선생님의 이야기를 오쿠쯔 님처럼 수치화를 한다면 오쿠쯔 님과는 정 반대로 스케치에 들이는 공이 20% 이하 채색에 들이는 공이 80% 이상이 될 거예요. (노스케치 수채화의 경우는 0:100%나 됩니다.)
[80% 스케치 + 20% 채색] vs [20% 스케치 + 80%의 채색]
그림의 시작인 스케치에 대한 경우만 봐도 두 스타일이 얼마나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죠? 그래서 상반된 방향성의 스타일이라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다만 한 방향성의 스타일을 선호한다고 해서 그 방향성의 극에 있는 그림만 좋아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극으로 나아가는 방향성 사이 어딘가에 본인이 좋아하는 스타일이 있겠죠? 오브젝트 중심 방향성이 극으로 가게 되면 극 사실주의 페인팅이 될 것입니다. 빛과 어두움 중심의 방향성이 극으로 가게 되면 거의 추상화의 영역까지 단순화될 거예요. 이를 표로 만들어 봤습니다.
[두 선호 방향성 스타일]
위에 제시한 두 그림들도 각각의 방향성 화살표 중 어느 곳에 위치하고 있을 것입니다.
작업에의 스타일이 바뀌는 것은 많이 목격했고, 제 그림의 경우도 많은 라인 스타일과 채색 스타일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단! 방향성의 스타일이 바뀌는 경우는 아직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만약 그림 모으기를 솔직하게 하셨다면 영역의 어느 즈음인지는 확실하지 않더라도 본인이 위치하고 있는 방향성이 어느 쪽인지는 분명히 아실 수 있습니다. 선호도가 두 스타일의 중간 영역에 위치하는 분들의 경우도 그중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정확히 중앙에 위치하진 않습니다. 그림을 배우실 때 본인의 선호 방향성 스타일을 분명히 알지 못하는 경우 자신의 그림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헤매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그려보면 이 방향성이 맞는 거 같기도 하고, 또 다른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른 방향성이 맞는 거 같기도 하죠. 그러나 본인의 선호 방향성 스타일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 비록 지금은 그렇게 그리지 못하고 있을 지라도 앞으로 어떤 식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알 수 있고, 이를 위한 연습을 하나씩 더해가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꼭 원하는 방향성의 그림을 그리실 수 있습니다! 만약 그림을 배우고 계시는데 선생님이 본인이 선호하는 방향성과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계신다면 본인이 원하시는 그림에 대해 진지하게 상의를 해보실 수도 있어요. 좋은 선생님들은 다른 스타일을 존중하시며 비록 본인의 스타일과 맞지 않더라도 원하시는 스타일로 나아가실 수 있는 다양한 조언들과 연습들을 제시하여 주실 것입니다.
여기서 정말 제가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자신과 상반되는 스타일을 절대로! 무시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너의 그림은 디테일이 없어, 세밀하고 정확하게 표현해야지."
"라인만 가득할 뿐 사진처럼 만들 필요가 있니? 빛의 느낌은 어디에 있는 거야?"
이러한 표현은 정말 잘못된 표현이고 정확하지도 않으며, 상대방에게 발전을 위한 조언은커녕 상처만을 안겨줄 뿐입니다. 자신이 선호하는 스타일이 옳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상반된 양 스타일 모두 최고의 마스터들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스타일은 스타일이지 정답이 절대 아닙니다! 상반된 스타일의 그림들도 너무나 멋진 그림들입니다. 절대 함부로 평가하지 마십시오. 본인의 그림도 마찬가지로 혹독하게 평가당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서로의 스타일을 존중하고 다른 스타일의 그림 또한 즐거워하신다면 그림을 즐길 수 있는 시야가 확장될 것입니다.
선호 스타일을 분명히 아셨을 때도 연습을 위해서는 상반된 스타일도 그려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림을 시작하실 때는 50:50으로 양쪽을 모두 두루 연습하시고 그림에 익숙하여지실 때는 본인의 선호 스타일 연습 비중을 높여가는 식이면 될 것입니다. 비율은 70:30 정도면 좋을 것입니다. 그 반대가 되면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경우가 아닌 한 선호하지 않는 스타일의 연습 비중이 너무 높아 그림을 그릴 때의 즐거움이 사라지고 부담이 증가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리고 꼭! 꼭! 꼭! 다음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선호 방향성 스타일을 알고 이를 추구하십시오.
그러나 상반된 스타일을 존중하십시오.
스타일은 스타일이지 정답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