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에 사라져가는 영화 골목
새벽 산책길에 아파트 1층 로비 문을 열고 나섰는데,
대낮같이 밝은 빛에 깜짝 놀랐습니다.
베롱나무의 분홍꽃이 조명을 받은 것처럼 선명하게 보였어요.
대낮에 보는 꽃 색깔과는 다른 분위기로 꽃이 예뻤습니다.
가로등 불빛과는 다르다 싶어 올려다보니,
서쪽 하늘에서 달빛이 내려오고 있네요.
달님이 아직 들어가지 않은 채 새벽길을 운행중이었습니다.
새벽 바람은 어제처럼 더웁지는 않게 느껴졌습니다.
아직 시원하진 않지만 습기를 잔뜩 머금은 채 온몸을 덮어왔던 어제의 바람보다는 한결 시원했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 주변에 새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습니다.
긴 시간 말만 무성했던 구도심 재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아파트를 짓는 공사 현장이 몇 군데 생겼지요.
우리 아파트는 고층 아파트인데요. 사직동 구도심에 딱 하나 우뚝 서 있는게 너무 튀었습니다.
곧 있으면 이 아파트도 여러 마천루 중 하나가 되겠지요.
동쪽 무심천 방향으로 용화사를 둘러싼 넓은 땅에 아파트 공사가 한창입니다.
남쪽으로는 국보로를 따라 충북교육도서관 아래쪽으로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고요.
북쪽으로도 아파트가 지어질 예정인데요. 도로를 따라 철제 가림막이 세워져 있습니다.
재개발은 빈 터에 아파트를 짓는 게 아니지요.
사람들이 살던 곳에 새로 지을 터를 닦아야 하기에 대규모 철거가 이루어집니다.
재개발이 진행되는 과정이 어떤건지 아실텐데요.
어느 날부터 거리거리에 온갖 현수막이 나붙지요.
우리 구역이 개발지역으로 확정된 것을 환영한다는 글귀가 있는가 하면, '결사 반대' 현수막도 내걸립니다.
조금 지나면 담벼락과 대문에 거대한 빨간색 'X'자가 써집니다.
스프레이 페인트로 써갈긴 'X'자가 대문, 담벼락, 점포 문에 그려지고 조금 더 있으면 거대한 벽이 세워지지요.
일반 주택이나 상가 지붕까지 가릴 수 있는 높이로 가림벽이 세워지는데, 재개발 구역 전체를 둘러싸지요.
관계자들만 드나들 수 있는 문을 빼고 구역 전체가 봉쇄됩니다.
익숙한 집과 가게들이 어느 날부터는 차단벽에 가려져 눈앞에서 사라지고,
거대한 성문처럼 열렸다 닫히는 출입문으로 덤프트럭만 드나듭니다. 어느 날 열린 출입문 사이로 보이는 그 동네는, 아무것도 없는 벌판으로 변해 있습니다.
아파트를 지을 터가 된 것이지요.
그렇게 만들어진 터 아파트가 세워지고 있습니다.
큰 길로 산책하다보면 어디서 오셨는지 모를 사람들이 바쁜 걸음으로 삼삼오오 함께 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오늘의 작업 현장으로 가는거겠죠. 이주노동자들도 많이 보입니다.
공사장 인부들이 새벽을 열어 놓으면 아침부턴 분양사업을 맡은 이들이 바삐 움직이겠지요.
그렇게 몇 달 지나면 우리 동네 주변은 반짝이는 아파트 숲으로 변해 있겠고,
익숙하던 동네 풍경은 세련된 도시로 바뀌어 있을겁니다.
그동안 간간이 영화 촬영을 하던 골목도 사라지고 산뜻해진 먹자골목이 생기겠지요.
자기를 향해 하루하루 몇 미터씩 솟아오르는 마천루를 바라보며 새벽달은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