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필자 Oct 20. 2023

외할머니

 한때지만 어릴 적엔 늙음과 낡음을 동일시했던 적도 있었다. 어디까지나 편견에 불과했으므로 자라면서 차차 깨닫기에 이르렀다. 낱말이란 모음 하나로도 의미가 어마어마하게 갈라진다는 사실을. 듬성듬성하게나마 어려서부터 외할머니를 보고 자란 성장 환경도 편견을 깨치는 데 일조했다. 외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늙음이 그토록 유쾌하고 귀여운 동사인지 영영 모르고 지냈을 것이다. 그간 명절이라든가 방학 때마다 알게 모르게 선행 학습을 해온 셈인데, 정작 당시엔 음식이나 세뱃돈에만 관심이 팔려 자각조차 못 했었다는 게 아이러니다.


 외할머니는 뵐 때마다 늘 생글생글한 얼굴이셨다. 엄마의 결혼 관련 일화도 그렇고 소싯적엔 의외로 완고하신 성격이셨다던데, 지금은 그런 모습일랑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특유의 유쾌한 화법이라든가 기성과 개성을 넘나드는 능청스런 분위기가 꼭 지금은 작고한 일본의 배우 키키 키린을 빼닮은 데가 있었다. 혹은 작가 사노 요코나 영화 <줄리 앤 줄리아> 속의 배우 메릴 스트립도 연상시켰는데, 공교롭게도 셋 다 내가 좋아하는 예술인들이다. 이쯤 되면 내가 유독 할머니들을 좋아하는 건지, 모든 할머니들이 예술가적 기질이 있는 건지 헷갈려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근심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외할머니였지만 매번 하하호호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한 번은 짓궂기 짝이 없는 농담으로 자식들을 기겁시킨 적도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엄마와 이모가 우연찮게 ‘배우자과 사별한 노인들의 치매 발생률’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시청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외할머니를 외롭게 두면 안 되겠다며 제주도고 문화센터고 카페고 강행군으로 여기저기 귀찮게 끌고 다닌 거다. 외할아버지 발인 당시, 이제 고스톱은 누구랑 치냐며 어느 때보다 비통해했던 외할머니였으므로 그런 자식들의 걱정도 무리는 아니었다. 반면에 외할머니는 외할머니 나름대로 멀쩡한 당신을 벌써부터 오락가락한 노인네 취급한다며 불만이 있으셨나 보다. 기회를 엿보다, 딸들의 등쌀에 떠밀려 나간 문화센터 수업에서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귀여운 복수를 꾀하셨다.


 “아이고, 아가씨들이 친절도 해라. 그런데 아가씨들, 혹시 우리 남편 못 봤어요? 근처 어디에 있을 텐데….”


 엄마와 이모는 순간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고 한다. 그 광경을 본 외할머니가 못 참고 웃음을 터뜨리셨기 때문에 겨우 농담이란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농담도 무슨 그런 농담을 하냐며 당장엔 화를 냈던 엄마와 이모도 내심 안심되긴 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아직 농담 칠 정신은 있으신가 보다고, 다음 달 문화센터 등록을 하지 않았던 걸 보면 말이다.

 이후 한동안 외할머니가 떠난 집에서 유유자적 독거하시던 외할머니는, 이듬해에 작은 외삼촌 댁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이사 간 동네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주말마다 종교 활동에 매진하며 열심히 새 고스톱 친구들을 사귀셨다고 한다. 유쾌함이란 신실함과 불경함 사이의 한 끗 차이. 어째선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농담도 농담이지만 내가 가장 좋아했던 외할머니의 언어는 따로 있었다. 어릴 적, 아빠의 주사가 유독 심해지는 날이면 엄마와 나는 도망 나와 밖에서 자곤 했다. 어쩌다 엄마의 주머니 사정이 괜찮은 날엔 여관에서 묵기도 했지만, 대개는 주인 없는 동네의 한 폐창고가 우리의 하룻밤 숙소였다. 벌레와 어둠과 잡동사니가 가득한 그곳에서 우린, 버려진 박스와 신문지들을 깔거나 덮고 잤다. 허클베리 핀도 우리의 숙영을 봤더라면 그 열악함에 질색했을 것이다. 그마저도 정 여의치 않을 때 엄마가 마지못해 찾았던 최후의 보루가 바로 외할머니 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도 엄마의 엄마에게 비루한 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거다. 그렇지만 어린 내가 혹처럼 옆에 딸려있는 이상에야 엄마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테다.


 정확히 지하철 열여섯 정거장 거리의 외할머니 동네에 당도하고 나면 늘 역 앞까지 외할머니가 마중 나와 계셨다. 겁먹은 나를 보며 괜찮다고 무심히 쓱쓱 달래주곤 하셨는데, 말 앞에 꼭 “야이고, 야야.”를 붙이는 게 특징이었다. 그러니까,


 “아이고, 야야. 안 춥나.”

 “아이고, 야야. 괜찮다.”


 같은 식이었다. 그런 밤에 그런 말들은 꼭 든든한 허수아비 같아서, 툭하면 참새처럼 지저귀던 내 작은 불행들을 훠이훠이 내쫓아주곤 했다. 뜨듯한 물로 목욕한 뒤, 외할머니 댁 안방에 이불을 깔고 누워 시청하던 이름 모를 심야 특선 영화들이 기억난다. 그 전파들 덕분에 수많은 신파적 밤들을 무사히 헤쳐 올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그 모든 안온들의 서비스 제공자인 외할머니야말로 내 가장 무해한 숙박업자였다. 그때 밀린 숙박비들을 나는 아직도 채 갚지 못하고 있다.


 비단 농담과 추임새뿐만이 아니더라도, 외할머니의 말들에는 사람을 안심시키는 어떤 매력이 있었다. 꽃에 비유한다면 빠르게 피고 지는 오월의 한철 장미보단, 소담한 여러해살이풀인 패랭이꽃에 가까웠을 것이다. 최근엔 어쩌다 한 인터넷 기사를 읽었는데, 꼭 외할머니의 어투를 닮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어려운 이들을 위해 써달라며 불우이웃 돕기 기금을 기탁하신 한 어르신에 대한 기사였다. 백오십만 원어치의 현금 다발과 함께 전달된 손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있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나라에서 행복했어요. 어려운 분들께 도움이 된다면 더욱더 행복할 것 같아요. -서산 노인으로부터」 


 아름다운 나라에서 행복했다는 그 부분이 충격적일 만큼 좋아서, 외할머니의 말투를 덧씌워 몇 번이나 곱씹어 읽어봤다. 어째서 그런 식으로 외할머니를 연관 지으려 했던 건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아름다운, 행복, 노인 같은 단어들로 인한 자연스런 연상 효과가 아닐까, 넌지시 짐작해 볼 뿐이었다. 일단 궁금해하긴 했으나 사실 이유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아무튼 내게는 서산 노인 못지않게 아름다우신 인덕원 노인인 우리 외할머니였다.  


 그런 외할머니도 최근 사촌 형제의 결혼식장에서 뵀을 때는 이전보다 많이 연로하신 모습이어서 깜짝 놀랐다. 특기인 말수도 부쩍 줄어드셨을뿐더러, 주변의 부축 없인 거동이 힘드실 정도로 기력이 쇠해 보이셨다. 이렇게 연로해 지시기 전에 진즉 좀 자주 찾아뵀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난 글러먹은 손주인 것 같다. 모쪼록 별 탈 없이 오래오래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깜빡한 말이 있었다. 패랭이꽃의 일본어 명은 도코나쓰常夏. 언제나 여름이라는 뜻이다.   



 외할머니 [명사] 세상에서 가장 정겹고 귀여운 명사.

이전 08화 전문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