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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먀니 Oct 25. 2024

탄생

 아득한 이전 세기의 을지로. 당대 성행하던 한 음악다방에 아직 앳된 얼굴의 수나가 앉아있다. 일행으로 보이는 남자와 지금 막 커피 두 잔을 시켜놓은 참이다. 생애 처음 보는 맞선 자리. 어렵게 잡았다는 어른들의 성화에 못 이겨 억지로 떠밀려 나온 자리였다. 모처럼 차려입은 정장과 구두가 자꾸만 불편하다. 가만있질 못하고 계속해서 자세를 고쳐 앉는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이름은 길연. 일찍이 상경해 지금은 을지로에서 작은 인쇄소를 운영하고 있다 했다. 복장에 꽤나 공을 들였는지 구두까지 위아래 올 화이트로 쫙 빼입은 색감이 특징적이다. 그 모습이 좀 과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수나는 길연이 아주 싫진 않다. 직업적으로 활자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뭔가 남들보다 건강한 사고를 지녔을 것 같은 느낌이다. 아무래도 몇 번 더 만나봐야 알 것 같다.


 “커피를 다 마시면,”


 수나가 먼저 입을 뗀다. 요 앞 청계천 좀 같이 걸을까요? 당찬 제안에 밝아진 얼굴의 길연이 흔쾌히 응한다. 아, 좋지요.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네. 끝나지 않았네. 


 때마침 장내엔 유행하는 조용필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어떤 역사의 첫 장. 내 부모에 관한 작은 고자질.


 인상적이었던 첫 만남 이후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됐다. 원래 그렇게까지 서두를 생각은 없었는데. 의외로 외할머니께서 큐피드 역할을 자처하셨다고 한다. 남자는 성실하고 제 밥벌이만 잘하면 그만이라며, 대단한 노익장으로 화살을 마구 쏘아대셨기에 기어이 한 발쯤은 스치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명동과 충무로와 을왕리 등지에서 몇 차례의 애프터를 가진 일. 양가 어른들의 주도 하에 신속하게 혼담이 오간 일 등은 어쩌면 특별할 게 없는 당대의 흔한 연애상이다.


 종로의 오래된 회관에서 결혼식을 마친 뒤, 둘은 곧바로 미아리고개 어느 사글셋방에 신접살림을 차린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그땐 그냥 잠깐만 같이 고생하고 집이든 여행이든 나중에 더 좋은 곳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랬던 수나가 막상 첫 해외여행을 가는 건 그로부터도 40년이나 지난 후이니, 인생이란 정말 속단할 수 없다. 다가올 미래는 꿈에도 짐작 못한 채 달콤한 한때가 속절없이 흘러간다. 얼마 후. 수나는 자신의 첫 아이를 임신했다.


 본격적인 이야긴 지금부터다. 결론부터 말하면 결국 아이는 태어나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악재가 모두의 운명을 틀어놓았다. 결혼 전, 길연이 수나 몰래 자신의 친형에게 서줬던 보증이 화근이었다. 친형의 사업 자금과 관련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런 큰 일을 덥석 무턱대고 저질렀다니. 아무래도 우애와 우매를 헷갈렸던 게 틀림없다.


 이런 유의 사연들이 대개 그러하듯 부주의한 선심 뒤에 따라온 풍경은 새빨간 압류 딱지였고, 종국에는 결혼반지고 인쇄소고 남김없이 탈탈 털리고야 말았다. 그나마 무사한 건 뱃속의 아이뿐이었는데. 불행은 좀처럼 한 번에 끝나는 법이 없다. 이번에는 길연의 집안 어른들이 나쁜 쪽으로 창의력을 발휘했다. 상황이 계속 악화되자, 생계를 빌미로 산모에게 은근슬쩍 중절을 종용한 거다. 일단 산 사람은 살아야지 않겠냐고, 숟가락 하나라도 덜어야 할 판국에 덮어놓고 낳는 게 능사는 아니라며 파렴치한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무지했던 거다. 이게 다 본인의 잘난 아들들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아니, 그때 아빠는 뭐 했어?”


 훗날 의아해진 내가 묻자 엄마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어디 가서 술이나 처먹고 있었겠지.”


 출산을 박대당하는 상황에서 끽해야 이십 대 중반의 어린 산모가 고를 선택지는 극히 제한적이었을 테다. 몇 번의 설득과 실랑이와 우격다짐 끝에 결국 일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진행된다. 그래서 어떻게, 살림이 좀 나아졌느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그저 새 균열이 일어났을 뿐이다. 당사자가 자세한 언급을 꺼렸으므로 이후의 일들에 대해 난 더 알지 못하지만, 방학 때마다 친가에 내려가면 어쩐지 엄마를 홀대하시던 할아버지의 얼굴만은 기억에 남아있다. 말도 안 되는 시대였고, 어떤 가해자들은 그렇게 시대 안에 숨어있기도 했다.  


 그때 그 커피를 다 마시지 말 걸. 


 수나는 자신의 결혼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몇 년 후. 종전의 아픔을 딛고 수나는 아이를 첫 출산한다. 마침내 내가 세상에 태어나던 순간이다. 난산이었다는데 그러고 보면 난산이야말로 정말 상징적인 명사가 아닌가. 뒤늦게 생각한다. 수척한 얼굴의 수나가 갓 태어난 나를 본다. 쭈글쭈글한 얼굴. 애들은 원래 이렇게 다 못생겼나 싶다. 손을 뻗자 작고 꼬물거리는 손으로 수나의 한 손가락을 움켜쥔다. 어머, 얘 좀 봐. 지문과 지문이 서로 맞닿고, 이제껏 겪어본 적 없던 뭉클함과 함께 수나는 엄마가 된다. 


 이야기는 세습된다. 엄마는 이 모든 일들이 하나의 커다란 암시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뒤늦은 나의 발병도. 하필이면 인쇄된 것들에 집착하는 내 유별난 기질도. 세상에는 좀체 한 번에 태어나지 못하는 기이한 존재들이 다분하고, 어쩌면 그건 내 본류와도 맞닿아 있다. 내가 아프거나 공모전에 낙방할 때마다 엄마는 극복이란 말을 썼다. 태어나는 건 즉 극복하는 일이라고. 그건 위로라기보다는 일종의 자기 고백 같기도 했다.


 유독 태어나지 못했던 어느 날. 하루 정돈 비참함을 만끽하려고 종일 침대에 널브러져 시간을 보냈다. 애인과 휴대전화로 한 시간이 넘게 떠들고, 냉장고에 있던 쿼터 사이즈 아이스크림을 한 번에 다 먹고, 장진영 작가의 신간을 읽으면서 온전히 하루를 보냈다.  


 늦은 저녁엔 그간 이런저런 핑계로 미뤄두었던 넷플릭스 영화를 시청했다. 앤드류 가필드 주연의 「틱, 틱... 붐!」이라는 영화였는데, 막 태어나려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그 아름다움을 넋 놓고 보다가 난 그만 까무룩 잠이 들었고, 꿈속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젊은 시절의 수나와 미처 태어나지 못한 나의 혈육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꿈이었다. 꿈인지도 모르고 거기서 우리끼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맘 같아선 계속 머무르고 싶었지만 꿈이란 유한하고, 세계는 꿈 밖에 있고. 잠에서 깬 뒤 어쩐지 입안에 새콤한 맛이 감돌았는데 그래서였을까. 예전 내 태몽이 자두였다던 엄마의 말이 퍼뜩 떠올랐다. 꿈속에서 엄마가 보았을 새빨간 자두의 모양을 상상해 보았다.


 나는 우리가 태어나리라는 것을 안다.


길연과 만나기 전. 수나였던 시절 남아있는 유일한 엄마의 사진입니다. 왼쪽에 흰색 모자를 쓴 사람입니다. 본인은 본인이 잘 나갔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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