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좀 이상한 여름이었다. 아무리 파업 중인 병원이란 점을 감안한다 치더라도.
병원 안은 텅 비어있었다. 로비와 식당가를 지나 외래병동에 이르기까지 전부. 간혹 스치는 사람은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극소수에 불과했다. 평소 환자들로 북적대던 풍경에 비하면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사라진 건 비단 사람만이 아니었다. 차들도 마찬가지. 여기서 일한 이래로 이렇게 입차가 적었던 것은 없었다며 철수는 고개를 휘 내저었다. 11년 차 주차 요원의 증언이니 믿어도 좋을 것이다. 몸은 편하다는 철수의 목소리가 너무도 생생하게 울려서 순간 당황했다.
모두 어디로 사라진 걸까. 꼭 어떤 재난 영화의 한 장면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의정 갈등으로 인한 전공의 파업에 이은 병원 총파업 이야기가 나돌던 지난 6월. 돌아온 정기 피검사를 위해 채혈 순서를 기다리며 어쩐지 난 좀 난방이 그리운 느낌이었다. 건물에서 풍기던 정체 모를 스산함 때문인지, 단순히 냉방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바깥은 여름인데, 안쪽은 병원인 걸 감안하더라도 이상하리만큼 서늘했다.
『ㅇㅇ대 병원 17일부터 무기한 전면 휴진… 파업 확산·의료대란 시작』
우려했던 사태가 터진 건 그로부터 딱 일주일 뒤다. 언론마다 하도 떠들썩해서 좀 긴장했는데, 실제 전면 휴진일은 사나흘에 그쳤으므로 나에게까지 피해가 미친 건 없었다. 게다가 나의 경우엔 분기에 한 번씩만 들르면 되는 통원 환자니까. 확률적으로 겹치기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어쩌다 공교롭게 시기가 맞물린 환자들도 차질이 없게끔 병원 측에서 미리 일정을 다 조정해 주었던 모양이었다. 대체 어떻게 알고 딱 해당 날짜만큼의 환자들만 선조치할 수 있었던 걸까. 아직까지 미스터리다. 애초부터 사나흘만 휴진하기로 암묵적인 시한을 정해놨던 게 아닐까 싶은데,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었다.
내가 그 아이들을 떠올린 건, 파업으로 곤경에 처한 소아 환자들의 뉴스 속보를 보고 나서였다.
내가 특별히 아이들을 사랑하거나 해서 그랬던 건 아니다. 그보단 단지 시각적인 이유였다. 오고 가며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던 세계니까. 하필이랄지, 내가 가는 소화기 내과 바로 옆으로 소아 병동이 붙어있던 탓에 보고 싶지 않아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날, 모두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병원에 오도카니 남아있던 아이들의 모습을.
의외로 우는 아이는 없었다. 가만히 엄마 품에 기댄 아이, 휴대용 링거에 연결된 몸을 이끌고 여기저기를 서성거리는 아이, 작고 여린 팔뚝에 주삿바늘을 잔뜩 찔러 넣은 아이, 동그란 두상을 훤히 드러낸 채로 앉아서 젤리를 먹는 아이. 울음은커녕 하나같이 자신에게 닥친 일을 채 이해하지도 못한 표정들이었다. 무지보다는 무구에 가까웠고, 오히려 그 점이 더 어떤 역설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훗날 의협 회장이란 작자가 파업에 불참한 아동병원들을 향해 조롱 섞인 막말을 내뱉었을 땐, 그래서 더 분개하고야 말았다. 정작 자기 자신도 소아과 의사면서 그런 파렴치하고 파쇼적이기 짝이 없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일삼다니. 스스로의 직업에 대한 윤리 의식이 아예 없는 건가 싶었다. 그런 자를 그런 자리에 앉힌 의사 집단에 대한 실망은 덤이었고 말이다.
솔직해져 보자. 사전적으로 의사란 ‘일정한 자격을 가지고 병을 고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뜻한다. 의료 정책에 관한 사안은 엄연히 보건복지부의 관할이고, 의대 정원 확대를 반대하는 이 집단적이고 장기적인 파업은 결코 의사들의 권한이 아니다. 예컨대 로스쿨 설립에 반대해 단체로 파업에 들어간 검사들이라든가, 신규 인력 채용 확대를 막으려 전원 사직서를 낸 회사원들의 이야기를 난 들어본 적이 없다. 무엇보다 환자를 살려야 할 의사들이 환자를 죽이는 방식의 파업을 이어가는 걸, 과연 우린 정당하다고 지지할 수 있나.
명분은 뭔가. 의료 인력 과잉, 진료비 증가, 의료교육 부실화 등을 막기 위해서라고 아무리 주장한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의료인으로서의 사명감 때문이라기엔 이미 너무 많은 패륜과 비행들을 들켜버렸으니까. 환자를 개돼지라 칭하고, 더 많은 조선인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저주하고, 현장을 지킨 의사들의 명부를 작성해 조리돌림하고, 진료보조 간호사들의 업무를 방해하려 관련 전산망의 비밀번호를 바꿔치기하면서 무슨 염치로 사명감을 입에 담나. 당장 눈앞의 환자를 외면하면서 십 년 이십 년 뒤의 의료를 도대체 뭘 어쩌겠다는 건지, 솔직히 납득이 잘 가지 않는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건 권리다. ‘의료의 현상을 왜곡시키는 정치적ㆍ사회적ㆍ경제적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의료인들이 주창한 환자의 권리선언을 보면, 환자의 권리엔 ‘개인의 존엄, 평등한 의료를 받을 권리, 최선의 의료를 받을 권리’가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의대 정원 확대 추진으로 촉발된 의정 갈등은 환자의 권리 침해를 야기한다. 이 명제를 참으로 만든 이들은 누구인가. 무능한 정치인인가, 나쁜 의료인인가. 정답이야 분분하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의사의 윤리는 환자여야 한단 것이다. 윤리를 저버린 집단은 필연적으로 점점 더 나빠질 수밖에 없다.
다시 한 번 떠올렸다. 그날 본 아이들의 모습을. 준비했던 말은 이게 끝. 이 이상한 파업에 휘말린 한 명의 당사자로서, 그냥 어디든 털어놓을 데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도 기분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