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인맥보다 중요한 건 합과 타이밍! 인연이 있어 가능했던 해외 이직기
난 인맥이라는 말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학창 시절 부모의 친구부터 사돈의 팔촌까지 모든 인맥을 동원하여 무엇이든 쉽게 해내는 주변 친구들을 보며 느낀 부당함이 너무나 컸기 때문일까, 사회인이 된 이후에도 '성공은 인맥'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럼 난 성공하긴 글렀네'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인턴십과 첫 직장을 구할 때까지만 해도 돈도 빽도 없는 내가 기회를 쟁취할 수 있었던 방법은 가능한 한 발품을 많이 파는 것,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시장 조사와 팔로업에 더 노력을 쏟는 것 정도였는데, 최근 1-2년간은 경력이 조금씩 쌓이면서 여러 경로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또 이 사람들을 통해 예상치 못한 기회를 얻음으로써 커리어에 있어 아는 사람의 중요성에 대해 새삼 느끼게 되었다.
물론 여기서 아는 사람이란, 없던 자리도 만들어서 꽂아줄 수 있는 높으신 아는 분이 아니라 어떤 목적성 없이도 좋은 기회가 있을 때 나를 찾아주는, 그런 '아는 사람'말이다.
이전 직장에서 1년간 채용 마케팅을 담당하며 가장 좌절스러웠던 부분은 인사팀에서는 마케팅이 투자가 아닌 지출의 일환으로 간주된다는 점이었다. 단순히 제품을 홍보하는 것보다는 다양한 문화권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진 조직을 홍보하는 것이 훨씬 뜻깊고 보람된 일이라는 생각에 들어간 인사팀이었지만, 막상 인사팀에서 마케팅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의 벽에 맞닥뜨리고 나니 지출 (cost) 보다는 투자수익 (ROI)을 중요시하는 소비자 마케팅으로 다시 돌아가고픈 마음이 간절했다.
내가 가장 먼저 속내를 털어놓았던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채용 마케팅 포지션에 지원했을 당시 나를 담당했던 리쿠르터였다. 내 말을 한참 듣던 그녀는 내게 그녀가 만나본 마케팅팀의 매니저 중 가장 명석하고 친절한 매니저 한 명을 만나보기를 권유했다. "지금 이 팀에는 빈자리가 없긴 한데, 그래도 한 번 만나서 우리 회사의 전반적인 마케팅에 대해 물어보고 조언받으면 좋을 것 같아. 채용만 하는 나보단 실무자가 더 낫지 않겠어?"
그렇게 이메일과 앱 캠페인을 통해 고객 리텐션을 담당하는 팀의 디렉터와 30분짜리 커리어 상담시간이 잡혔다. 단순히 상담 목적으로 만들어진 자리었기에 내가 평소에 궁금했던 내용 외에는 아무것도 준비해 가지 않았고, 이야기는 내 경력에 관한 간단한 소개로 시작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게 계획대로 되고 있... 는 듯했으나 나는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화이트보드에 주어진 시나리오에 대한 확률 계산법의 공식을 쓰고 있었다. 30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강도 높은 질문은 계속됐고, 난생처음 접하는 통계 용어와 마케팅 캠페인에 대한 접근 방식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그래도 당연히 면접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덕분일까, 모르는 부분은 편하게 물어보고 디렉터의 설명에 기반하여 다시 답변할 수 있었다.
그 날의 세션은 다른 팀에 자리가 있는지 알아봐 주겠다는 디렉터의 말을 끝으로 훈훈하게 마무리되었고, 나 또한 팔로업 이메일로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 후로도 회사 전체 행사에서 몇 번 마주쳐서 인사를 나누기는 했지만 채용 면에서는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기에 그저 내 역량이 부족했거니 생각하며 외부 이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첫 미팅 후 3개월쯤 지났을까, 미팅 주선에 도움을 준 리쿠르터에게 사내 메신저로 연락이 왔다. "너, 아직도 마케팅팀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면접 보러 오래."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두 번의 공식적인 면접이 진행되었고, 최종 오퍼를 받은 지 한 달도 안되어 마케팅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최종 오퍼는 처음 미팅을 한 디렉터를 통해 구두로 먼저 받았는데, 그 자리에서 오퍼 소식보다 기뻤던 건 그가 했던 이 말 때문이었다.
"난 우리가 처음 미팅을 한 그 날부터 널 우리 팀에 데려오고 싶었어. 다만, 지금까지 마땅한 자리가 없었을 뿐이야!"
이렇게 합류하게 된 팀은 건전한 문화와 빠른 일 처리 속도, 그리고 사내에서도 상위권에 드는 팀 성과를 자랑했던, 내가 만난 최고의 팀이었다. 싱가포르로 이주를 하게 되어 아쉽게 작별을 고해야만 했지만, 아직까지도 팀원들과 멀리서나마 서로를 응원하며 안부를 묻고 있으니 이 정도면 성공적인 이직이었다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여담이지만, 갑작스럽게 싱가포르로 올 수 있었던 것 또한 잠깐 스친 인연 덕분이었다. 순전히 공짜 맥주 하나만을 위해 참석한 네트워킹 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지인의 지인이 2년 뒤 본인의 팀에 자리가 났을 때 나를 기억하여 찾아주셨고, 나 또한 감사한 마음에 면접에 응하고 보니 팀과 직무, 그리고 싱가포르이라는 근무 환경 또한 마음에 들어 결국 그 분과 6개월째 함께 일하고 있다.
우리의 두뇌는 종종 즉각적인 손익 관계를 계산하여 판단을 내리곤 한다. 특히 비즈니스가 연관된 상황일 때는 더욱이. 그래서 지금 내가 원하는 것, 이루고자 하는 것에 득이 되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과의 만남의 기회는 ‘어차피 알아도 도움 안 되는 사람’이라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무시하기도 한다. 나 또한 과거에는 그랬다.
하지만 도움받을 일은 언제라도 생길 수 있고, 내가 도움을 줄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낯선 사람 효과'라는 책에서 리처드 코치가 말했듯 스쳐 지나가는 '그냥 아는 사람'이야말로 우리의 삶에 무한한 기회와 가능성을 제공해줄 수 있는 존재다. 그러니 누가 됐던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상대에 대해 알아가고 또 나를 알릴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면, 내게 일어났던 이 마법 같은 일들이 더 자주,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