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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Aug 27. 2019

얼음의 허들링

석빙고는 옛날에 얼음을 보관하기 위해 돌로 만든 얼음 창고다. 한겨울 강물이 두껍게 얼군인과 강촌 주민들은 얼음을 톱으로 잘라 석빙고로 옮겨 볏짚을 깔고 차곡차곡 쌓아 보관했다. 기록에는 신라 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나 현재 남아 전해지는 것은 모두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시설이다. 

석빙고는 반지하 구조를 기본으로 내부는 돌로 두르고 외부는 흙으로 덮어 열의 전달을 막았다. 바닥엔 경사를 두어 얼음 녹은 물이 흐르도록 하고 천정의 환기구로는 더운 공기를 밖으로 내보냈다. 이렇게 내부를 차갑게 유지하여 여름철까지 겨울 얼음을 보관하여 할 수 있었다.    

안동 석빙고 내부 [문화재청]

석빙고 안에 보관된 얼음 속에는 겨울의 추위가 담겨 있었다. 석빙고 안에서 겨울 얼음은 바깥의 계절을 견뎌내고 뜨거운 여름 속에서 사람들에게 겨울의 추위를 전달했다. 옛사람들은 한여름에 석빙고에서 얼음을 꺼내먹으며 얼음이 전해주는 차가운 겨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달성 현풍 석빙고 [문화재청]

커피숍에서 아이스커피를 마시다가 지금 만들어졌을 얼음을 보며 문득, 옛날 석빙고에서 계절을 넘긴 겨울 얼음을 떠올렸다. 냉장고나 에어컨처럼 냉매를 이용하여 온도를 낮추는 기술이 없던 시절에 여름까지 겨울 얼음을 녹지 않고 보관한 것은 생각해보면 대단한 일이다.


'조상의 지혜'라거나 '석빙고의 과학'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얼음이 녹지 않고 계절을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은 석빙고보다는 얼음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다. 차곡차곡 쌓인 얼음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냉기로 주위 온도를 낮추어 녹지 않고 여름을 지낼 수 있었. 얼음 한두 덩이로는 불가능한 일이어서 많은 얼음이 각자 몸에 담은 겨울 기운을 뿜어내며 함께 해낸 일이다. 석빙고는 다만 그 냉기가 밖으로 새지 않게 돕는 역할을 했다.

'허들링'이라는 말이 있다. 남극의 겨울에 매서운 눈폭풍이 몰아치면 펭귄은 여럿이 모여 커다란 원을 만든다. 서로의 몸을 밀착시킨 수천 마리 펭귄들이 천천히 움직이며, 바깥에서 찬바람을 직접 맞던 펭귄은 무리 안쪽으로 들어오고 안에서 추위를 피했던 펭귄이 다시 바깥으로 나간다. 이렇게 어떤 펭귄도 추위에 얼지 않고 번갈아가며 서로의 체온으로 겨울바람을 이겨내는데, 이런 펭귄의 생존 방법을 허들링(Huddling)이라고 부른다.


한겨울 세찬 폭풍 속에도 펭귄들을 얼지 않게 하는 온기의 원천은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펭귄 각자의 체온이 그 힘의 기본이 된다. 수많은 펭귄들이 체온을 서로 나누고 눈보라에 교대로 막아서며 추운 남극의 겨울을 견뎌낸다.  

펭귄의 허들링[Australian Antarctic Division]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는 힘은 스스로에게 있다. 얼음이 석빙고에서 더위를 극복하고 펭귄이 허들링으로 추위를 견뎌낼 수 있는 이유는 얼음이 가진 겨울 기운과 펭귄의 따뜻한 체온 덕분이다. 그 차갑거나 따뜻한 온도는 한데 모였을 때 커다란 힘이 된다. 얼음은 차곡차곡 쌓이고 펭귄은 빽빽한 무리가 되었을 때 비로소 계절을 극복하는 연대를 완성한다. 


수월하지 않은 상황은 언제든 나타난다. 환경이 척박할 때 우리 시선은 안으로 향해야 한다. 극복의 힘은 내 안에 있거나 우리 안에 있다. 힘은 결국 내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펭귄의 허들링[Australian Antarctic Divi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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